뛰어보자 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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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 승인 2014.04.1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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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스크래치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꽃비 나리고 새소리 정겨운 봄날이다. 자연에 뒤질세라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있는 행사로 눈과 귀가 호화를 누린다. 내린 봄비에 꽃들이 자리 바꾸기를 한다. 벚꽃이 피었다고 상춘객들로 방방곡곡이 들썩이더니 벚꽃 지자 영산홍이 꽃불을 켜기 시작한다. 변화무쌍한 자연 속에 우리의 감성도 덩달아 깜박거린다.

T.S 엘리엇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은 자라고 추억과 정욕이 뒤엉키고 잠든 뿌리는 봄비로 깨어나는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자연의 환영에 나약한 우리가 주체할 수 없는 감성의 흔들림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싶다. 벚꽃 피면 하늘거리고 싶고, 복사꽃 그늘에 앉으면 해롱대고 싶고, 아그배꽃 아래 서면 기다리지 않아도 누군가 다가올 건만 같은 4월이 아닌가.

잔인하다는 4월, 벚꽃 진 무심천변과 예술의 전당에서는 청주예술제로 한창이다. 벚꽃 진자리에 예술제가 대신 채워주고 있다. 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나 묵은 기억과 감성을 일으키기 충분할 만큼 다채로운 행사가 우리 지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중소도시에서 국경을 넘어 지구촌이 하나가 된 지가 벌써 여러 해, 우리 고장 무심천에서도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다문화 한마음 축제가 함께 펼쳐지고 있다.

세계 평화를 부르짖는 우리의 바람은 예술로 승화시켜 사랑이란 커다란 굴레에서 우리 가슴을 자연스럽게 울려야 한다. 김연아와 비틀즈가 세계인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마지막 무대 ‘이매진(Imagine)’처럼. 모든 예술의 핵은 감동이다.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적당한 온도에 맞춰 필요로 하는 곳에 데워준다면 세상은 참 따뜻하겠다.

나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할 때 자주 눈물을 훔친다. 혹시, 내 눈물샘이 고장 난 건 아닌가 하고 점검해 보기도 한다. 얼마 전 청주시립교향악단이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드보르작의 작품을 선보였다. 동료들과 버스에서 내려 콘서트홀로 가기위해 지하로 가면서 서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다들 좋아했다. 지역이 아니라 중앙에서 논다는 말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 주위 환경이 설치해 놓은 권위인 것 같다. 주체인 나는 청주에서든 서울에서든 그저 나인데.

연주는 드보르작으로 보헤미아의 한적한 도시에서 열리고 있는 흥겨운 축제장면을 방황하는 나그네가 보고 느낀 것을 묘사한 사육제(카니발)를 시작으로 첼로 협주곡 b단조, 교향곡 제8번 G장조로 이어졌다. 음악이 흐르는 정서는 작곡가의 정서가 담겨 있다. 음악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넓은 들녘 호수에서는 오리가 거닐고 언덕 아래로 여러 마리의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초록바람이 가득한 공간에 프레임을 어디에 옮겨놓아도 유유자적하다.

서정적으로 흐르던 음악이 갑자기 우레가 밀려오듯 천지를 불안하게 한다. 무슨 일일까?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드보르작이 사랑하던 요세피나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옆에 두고 가운데 앉았다. 남자의 오른손이 오른쪽 여자에게로 가기 위해 들썩이자 눈치를 챈 왼쪽 여자가 휑하니 뛰쳐나간다. 남자의 왼손이 안절부절못한다. 평화로운 들녘이 어수선하다. 수습하려고 애쓰는 남자의 손이 안쓰럽다.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감동을 주는 건 예술이다. 똑같은 사람들이 연주하고 있는데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듣는 것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듣는 음악의 느낌이 다른 것은 무엇일까? 환경에서 오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자연이 우리를 눈뜨게 하는 계절, 청주의 봄도 불끈 달아오르고 있다. 청주 사람이 서울에서 감동할 게 아니라 서울 사람이 청주에서 와 감동할 수 있도록 청주가 문화도시로 꽃 피우는 날을 기대해 본다. 이젠 청주에서 뛰어보자 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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