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발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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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9.2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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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크는 나무들
김 일 향 <영동초 교사>

공개수업 준비로 한창 바쁜 오후, 전화 한통을 받고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다리가 풀려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어야만 했다.

"범이 어머니! 담임이예요. 범이가 우유 급식시간에 교실에서 돌아다니며 우유를 마시다 몇 방울 흘려서 친구들이 휴지로 닦으라고 했더니 남에 것은 쓸 수 없다며 가위로 옷을 잘라서 닦았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맴돌아 너무 고통스러웠다. 보통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를 데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섯 살 때에는 친구들이 뿌린 썩은 우유와 모래로 온몸을 마사지 당하고 엄마에게 혼날까 봐 수돗가에서 그 추운 날 손이 꽁꽁 얼도록 옷을 닦고 또 닦았던 아이, 3학년 때에는 친구들이 반지의 제왕 속의 골륨이라고 놀렸다는 이유로 충격을 받아 3층에서 뛰어내리려 했던 아이.

하나하나 짚어보면 모두 위험한 고비들이 많았었다. 이제 4학년이 되어 잘 적응하나 싶었는데 여지없이 또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나를 놀라게 하는 녀석이다.

집에 가 보니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크게 틀어놓고 동생까지 데리고 어디로 갔는지 30분을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겁이 덜컥 났다. 오늘 일 때문에 혼날까 봐 동생까지 데리고 나가 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조바심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즈음 아파트 뒤쪽에서 한바탕 시끄러운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어디 갔었니"

"엄마 마중 갔는데 벌써 오셨어요 못 만나서 다시 돌아오는 길인데."

너무도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얼른 고개를 돌려 집으로 들어왔다.

"범아, 왜 그랬어"

"아, 그 일이요. 엄마! 예술가들은 일부러도 옷을 찢는데 뭐 이깟 것 가지고 그러세요"

"정말 괜찮은 거니"

"엄마, 걱정마세요. 제가 엄마를 닮아 좀 소심하잖아요."

심각하게 묻는 나의 말에 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곤 보던 만화에 열중한다. 그 순간 내 안에 있던 근심 걱정이 날개를 달고 내게서 멀리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곤 잠시, 내 자신에게 반성의 매를 들어 본다. 내가 가르쳤던 수많은 아이들을 혹시 매일 한 가지 잣대로만 쟀던 건 아니가 하는.

이렇게 각각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자신의 생각이 뚜렷한 아이들에게 학생은 항상 이래야 한다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억지로 집어넣고 구우려 했던 벽돌쟁이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몰랐다. 무조건 공부 잘 하고 말 잘 듣는 아이가 모범생이고 최고인 줄 알았는데, 내가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자라 평범한 아이와 뭔가 다르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하는 모든 아이들의 각각 다른 생각 나무들.

"사랑하는 아들아! 요리사가 꿈인 네 눈엔 교실 바닥의 우유 한 방울이 닦아야 하는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 빵과 케이크 속에 들어가 다시 새롭게 탄생하는 소중한 생명이었구나."

내일은 좀더 일찍 출근하여 혹시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한 그 아이만의 아픔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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