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사발에 힘 모으고 마음 합치고
막걸리 한사발에 힘 모으고 마음 합치고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3.10.24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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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노동을 소리로 달래다-충북의 소리를 찾아서
<22> 옥천군 동이면 소도마을의 권주가

품앗이 농사로 이웃사랑 실천
술 한잔에 고된 농사일도 훌훌
노래 한자락에 시름도 흘려보내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 소도마을은 건강한 어르신들이 농사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장수마을이다.

80세 이상의 건강한 노인이 많아 2005년 장수마을로 지정됐다. 65세 이상 노인이 70명이 넘고, 80세 이상도 20명이나 된다. 노인들은 낙천적인 생활과 많이 웃는 것이 장수 비결이라 했다. 그분들 곁에서 일상을 지켜보는 가을 하루가 참 달고 흐뭇했다.

소도마을은 금강 옆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식이 필요할 때쯤 나타나는 곳, 금강과 크고 작은 산이 만나 서로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곳, 금강휴게소가 바로 근처에 있다. 맑은 물과 소박한 산이 균형을 맞추듯 이 마을 어르신들 또한 그렇게 네 일, 내 일 가리지 않고 마음을 모으며 살아간다.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보니 수량이 풍부해 벼농사와 포도농사를 주로 한다. 김양환 노인회장(76)을 중심으로 넉넉한 인심과 정으로 끈끈하게 엮인 공동체 문화가 자랑이다. 기계화로 대량생산이 화두인 요즘, 다른 마을에서 보기 힘든 품앗이 농사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수호신처럼 나이 많은 느티나무가 큰 덩치를 자랑하며 버티고 섰고, 나무아래에는 마을 풍경만큼이나 편안한 정자가 있다. 그 정자에 앉아 이웃 소식도 전하고, 품앗이 일정도 짜며, 막걸리가 한 순배 돌면 노래도 부른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힘을 합칠 일거리가 생기면 누구네 일이건 상관 없다.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나 일감이 있는 곳으로 몰려간다. 아무리 많은 일도 흥겨운 농요에 맞춰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합치면 금세 끝이 난다.

청명한 가을 오후, 잔뜩 기대감을 품고 찾은 소도리 마을 입구에선 길바닥에 널어놓은 곡식들이 먼저 이방인을 반긴다. 수확한 벼와 들깨 등이 가을볕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벼 수확은 기계로 하지만 그렇다고 농사일이 그리 쉽게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수확한 벼를 기계로 말려도 되지만 질 좋은 쌀을 만들기 위해 햇볕에 말린다. 마침 한 쪽에서는 널었던 벼를 가마니에 담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50㎏이나 되는 볏가마를 70세를 훨씬 넘긴 노인들이 번쩍번쩍 들어 옮겼다. 마치 장정들의 힘찬 노동을 보는 듯했다.

스무 가마도 넘는 볏가마를 모두 옮기자 어느덧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볏가마 주인인듯한 어르신이 막걸리와 직접 만든 도토리묵을 안주로 내 놓자 힘든 기색은 하나도 없이 모두 즐거워했다. 지나가는 행인까지 불러 세워 막걸리 한 잔씩을 권하니 어느덧 흥겨운 마을 잔치로 변했다. 볕에 그을린 얼굴마다 행복한 웃음이 가득 차고 노랫소리가 저절로 울려펴졌다. 노인들은 평생 편히 쉴 새 없이 열심히 살았지만 얼굴 마다 넉넉함이 가득하다. 마을 앞 도적봉 위로 뜨는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건 젊었을 때와 변함이 없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을 어르신들의 마음이 코스모스처럼 청초하다.

김씨는 어느 새 팔을 걷어붙인다. 도리깨질을 하며 팥을 털고 있는 강화자 씨(73세)를 돕기 위해서다. 김씨는 18세부터 농사일을 했다. 이른 아침 일을 시작하면 새참에 국수나 수제비가 나오기 전에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신다. 땀 흘려 일하고 난 후 소박한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안빈낙도가 따로 없다. 막걸리 한 잔에 흥을 더하고 소리 한 자락 부르면 노동의 고통도 어느덧 사라진다.

김씨는 “힘든 농사일을 평생 했어도 막걸리 한 잔에 노래 가락을 싣고, 즐겁게 일을 한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밝혔다.

쌀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었다. 밀주를 단속하던 시절에 몰래 담가 마시던 밀주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김씨의 부인 태옥춘 씨(72)는 1996년 김씨의 회갑 잔치에 동동주를 직접 담가 이웃들과 정을 나눴다.

최완근 씨(74세)는 “일하다 권주가를 부르며 새참 막걸리를 마시면 정말 꿀맛 같다”며 “힘든 일을 하고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맛을 모를 것이다”고 말했다.

농산물 가격이 싸서 농기계 대여비, 인건비, 농약대금 등을 주고나면 겨우 식량 정도만 남지만 조상들이 지어오던 땅이니 힘들어도 흙에 기대어 산다. 고된 일 뒤에 막걸리 한잔 마시면 힘든 것도 모른다. 그러다 신이 나면 어깨춤에 노래도 한 자락 부르며 농사를 짓는다.

막걸리는 땅에 의지해 삶을 이어가는 농민에게 큰 힘이 된다. 즐거울 때, 슬픔을 달래야할 때, 마음이 울적할 때, 반가운 친구를 만났을 때도 마시지만 농사일을 할 때 새참으로 마시면 새로운 힘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권주가’는 술자리에서 술을 권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권주가는 12가사 중의 하나로 현행가와 구가가 있는데 지금은 현행가만 불려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권주가를 모두 잘 부른다. 권주가를 불러달라고 청했더니 김씨와 최씨는 천정희 할머니(84)가 권주가를 구성지게 부른다고 추천했다.천 할머니는 18세에 옆 마을에서 시집와 7남매를 낳았다. 행복한 시절도 있었지만 굴곡도 많았다. 먹을 것이 없어 산나물을 캐서 끓인 죽으로 자식들 배를 채웠어도 38세 되던 해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다툼 한 번 없이 화목했다. 그후 힘들어하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7남매를 혼자 키웠다. 농사일은 물론 산에서 땔감도 해 머리에 이고 날랐다. 천 할머니는 “고된 일도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권주가를 흥얼거리면 힘든 줄 모르고 했다”며 밝게 웃었다. 고된 삶을 꾸려 왔지만 노래하는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늘 신명 넘치는 할머니다. 살아내는 일이 힘들 때면 흥겨운 노래로 이겨냈다. 천 할머니는 많은 노래를 알고 있었다. 한 곡을 부르고 나면 “또 부를까 뭐 할까”라며 듣는 이들의 흥을 돋워주었다. 큰아들 내외와 살고 있고, 둘째 아들은 면장이다. 목소리도 맑은 권주가를 흥겹게 두 곡이나 불렀다. 천 할머니가 부른 권주가를 들어보자.



◇ 권주가 1

잡수시오 잡시오시오

이술을 한잔을 들으시오

이술을 한잔을 술이 아니라

먹고 놀자는 경배주라

이술 한잔 받으시면

천년만년을 살으리라

◇ 권주가 2

은잔 금잔 다 그만두고

앵무잔에다 술을 부어

첫째잔에는 불로초이요

둘째잔에는 천상주라

술잔을 다시부어 소원성취를 비나이요

 

강화자 씨(73세)도 마을에서 권주가 소리꾼으로 통한다. 강씨는 23살에 장화리에서 시집와 1남1녀를 낳고 평생 농사를 짓고 있다. “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늘 행복해요. 돈에 욕심이 많으면 머리가 아프지요. 우리는 마음이 부자예요”. 이번에는 강씨가 권주가를 들려줬다.

 

◇ 권주가 3

시오시오시오 받으시오

이술 한잔을 받으시오

이술은 술이 아니라

먹고 놀자는 경배주라

 

탐스럽게 영근 가을의 향기가 마을에 가득하다.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어르신들의 노래소리는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욕심없는 삶이 이들의 행복지수를 높여준다. 소박하지만 매일이 소소한 행복의 연속이다. 이 가을, 행복의 해답을 소도리에서 찾는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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