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날들의 삶·限 작은 상처·가슴시린 회한
살아온 날들의 삶·限 작은 상처·가슴시린 회한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3.10.17 1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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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노동을 소리로 달래다-충북의 소리를 찾아서
<21> 제천시 백운면 도곡리 김귀남의 돈타령


고달픈 삶 지탱 지친 세상살이 접고

고향서 농사지으며 새삶 타고난 소리꾼

답답한 속 소리로 달래 풀어내는 마음의 소리

가을의 한가운데를 느끼며 김귀남씨(73·사진)를 만나러 간다.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있고, 멀리 하늘은 맑고 높다. 살랑살랑 코스모스를 간지럽히는 바람 냄새도 좋다. 먼 곳까지 소리를 찾아 떠나는 길이 무척이나 행복하다.

김씨가 사는 제천시 백운면 도곡리 마을은 조선 말 제천군 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한산포·우경·화산·공재를 통합해 제천군 백운면 도곡리가 되었다. 19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시·군이 통합되면서 제천시로 편입됐다.

김씨 집을 찾은 것은 이번이 세번째다. 누렇게 잘 익은 커다란 호박을 수확해 놓은 마당에서 김씨를 만났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부쩍 늘었다. 두번째 방문 했을 때에는 다른 분들 옆에서 조용히 노래만 부르던 그가 이번엔 편안하게 살아온 이야기도 풀어놓고 노래도 여러 곡 불렀다.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 누구나 나름의 크고 작은 상처와 가슴 저미는 회한이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의 응축된 힘이 고달픈 삶을 지탱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웠던 추억뿐 아니라 견디기 힘들었던 상처가 때로는 삶의 힘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태어나 아리고 쓰린 가슴을 안고 살다 가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을 담아내고 풀어내는 것이 또한 소리가 된다.

민요를 만나러 다니는 곳마다 소리꾼들의 소리에는 그들의 한과 아픔이 그대로 녹아 있다.

김씨의 노래 속에도 살아온 날들의 아픔만큼 한이 서려 있다.

대처에서 주유소를 두군데나 운영했던 김씨는 믿고 맡긴 친척이 부도를 내는 바람에 맨몸으로 선산이 있는 이 마을 부모님 산소에 죽으려고 왔다.

이틀 동안을 부모님 산소 옆에 탈진한 상태로 누워 있는 김씨를 마을에 사는 조카가 발견해 목숨을 구했다.

조카의 간곡한 설득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비어 있는 친척집에 기거하는 중이다.

인심 좋은 동네 사람들 덕분에 논과 밭을 빌려 농사도 짓고 있다. 논 열 마지기에 벼농사를 짓고 밭에는 콩, 고추, 배추, 무 파 등을 심었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가슴이 저려 오지만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젊은 시절 타고난 목청으로 추석에 마을에서 열리는 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하고 상품으로 주전자와 세숫대야를 타기도 했다.

어릴 때는 여장을 한 채 무등을 타고 상모까지 돌려 구경꾼들의 갈채를 받았다. 꽹과리도 잘 치고 퉁소도 잘 불었다. 퉁소는 대나무를 깎아서 직접 만들었다.

뒷동산에 올라가 퉁소를 불거나 노래를 부르면 동네 처녀들이 모여들었다.

소리를 하던 중 옛일이 생각나는 듯 눈물을 내비치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도 했다. 하루 일을 방해하고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대처에서 배운 경험으로 동네에 농기구가 고장이 나면 척척 고쳐주기도 해 마을에선 ‘맥가이버’라는 별명으로 통한다.

옛날과 달리 요즘은 대부분 기계로 추수작업을 한다. 논바닥이 질어 트랙터가 들어갈 수 없는 논과 경지정리가 되지 않은 논은 낫으로 벼를 벤다.

벼를 베는 김씨를 따라가 보았다. 벼를 베면서 한이 가득한 가락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격한 감정들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인지 사발가, 정선아라리, 돈타령, 담배노래 등을 부르는 김씨의 구성진 소리가 점차 마음 편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김씨의 구성진 소리를 배경삼아 잘 여문 벼이삭 사이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메뚜기를 잡았다.

김씨는 벼 베기를 마치고 붉게 익은 고추를 땄다. 고추를 따면서도 노랫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노래가 끊기지 않도록 일하는 김씨 뒤를 조용히 따라다니며 녹음을 했다. 그의 소리는 목으로 내는 것이 아니었다.

가슴으로부터 쥐어짜듯 토해내는 소리가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 만들었다.

고추가 실린 손수레를 밀고 가며 그는 정선아라리를 불렀다.

“이 소리는 옛날에 산에 나무하러 올라갈 때 불렀어요. 내려올 때는 무거운 나무를 지게에 지고 내려오기 때문에 헉헉 숨이 차서 소리를 할 수가 없었지요.”

농사철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주로 말라죽은 가지나 삭정이를 해오는 것이 남자들의 또 다른 겨울 일과였다.

지금은 나무도 하지 않고 수확한 농산물을 손수레로 나르기 때문에 지게도 거의 없어졌다. 웬만한 논이나 밭까지 농로포장이 잘 돼 있기 때문에 경운기와 최신식 농기계를 사용한다.

김씨는 요즘도 가을 산에 올라 산 밤을 주워담으며 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

김씨는 “노래방에서 부르는 유행가와 다르게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말했다.

삶이 담기고 한이 담긴 소리는 가슴을 저미는 서늘한 기운이 있다.

그는 이 외에도 많은 노래를 알고 있었다. 김씨는 “일을 하다 힘이 들면 노래를 부른다”며 “일하면서 소리를 안 했더라면 일도 못했고 힘든 상황을 견디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사발가’와 ‘정선아라리’의 사설까지 빠뜨리지 않고 술술 불렀다. 단숨에 불러내고도 연신 이어지는 사설 속에 살아온 세월만큼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아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소리로 답답한 속을 풀어냈다.

“여럿이 함께 불러야 되는 노래도 있어요. 11월 말쯤 마을 노인회관을 개방하면 또 찾아오세요.”

김씨의 따스한 작별인사를 뒤로하고 돌아서는 가을 길이 그렇게 청명하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 돈타령

돈나온다 돈나온다 오공단 조끼에 돈나온다

돈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시누야 남편이 돈받으란다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좋다 아니노지는 못하노니

◇ 정선아라리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나.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정선읍네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을 안고 뱅글뱅글 도는데

우리집에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을 왜 모르나.

◇ 오봉산타령

오봉산 꼭대기 에루화 돌배나무는

가지가지 꺾어도 에루화 모양만 나누나

에헤야 대헤야 영산홍에 봄바람

◇ 사발가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만 펄펄나고요

요내가슴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아니나네

에헤야 어여라 난다 디여라 허송세월을 말어라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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