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52 - 황량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2
단상(斷想) 52 - 황량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2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3.08.29 18: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승범시인의 지구촌풍경
윤승범 <시인>

이십여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처음 여행이라 여행의 방법도 요령도 몰랐을 때였습니다. 그저 선불맞은 멧돼지처럼 중구난방으로 텀벙거릴 줄만 알았지 사물의 전도(顚倒)와 본말(本末)을 분간할 줄 모르는 시절이었지요. 그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 중의 하나가 ‘노 프로브럼 - 아무 문제 없다’ 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도인들의 사고 방식은 우리네가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빈도수가 높고, 자기네 이익을 위해 거짓을 포장하는 경우가 많고, 몇 푼의 잔돈 때문에 했던 말을 안 했다고 하는 그런 사기(詐欺)의 행위가 빈번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노 프로브럼’을 외칩니다. 그리고 도리어 묻습니다. ‘왜 화를 내느냐? 어차피 다 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그들이라 에어콘 택시를 예약하고도 털털이 짚차를 타야했고, 침대칸을 지불하고도 좌석을 타고 가야 할 때도 있고, 음식에서 바퀴벌레가 나와도 문제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과의 무수한 언쟁과 다툼으로 여행이 망쳐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면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놈 말 다르고 저놈 말 같지 않으니 그렇지 않아도 짧은 영어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내둘리다보면 내 여행은 점점 망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그들이 한다는 소리가 ‘노 프로브럼’이랍니다.

어쨌든 배는 채웠고, 잠은 잤고,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느냐는 논리입니다. 과정이야 어쨌든 간에 내 배도 채웠고 지들 실속도 채웠으니 둘 다 이익이라는 가당치 않은 논리에 번번이 당하고만 말았습니다.

그런 사소한 일들이야 이제 달관하자고 마음 먹었으니 예전보다는 낫습니다. 의례히 그러려니 하고 다닙니다만 불뚝성있게 일어나는 짜증은 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이번에는 히말라야의 다른 면을 갔습니다. 지난 번에 보았던 저쪽에서의 히말라야 만년설 녹은 물은 탁하고 차갑기만 했는데 이 쪽 면의 물은 투명하고 맑고 차갑습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차가 부서지든 말든 내 머리가 차 천장에 부딪혀 깨지든 말든 거칠게 운전하던 지프차 운전수를 꼬셔서 차를 세웠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저 투명한 물을 접하지 않고 간다면 후회가 이만저만 아닐 듯 싶었습니다.

갓 녹은 만년설 물은 차갑고 투명해서 눈으로 보기에 보석 같았습니다. 그 물로 세수를 하고 수건을 적셔 목에 두릅니다. 품은 속이야 어떻든 맑고 아름다우니 손쪽박으로 떠서도 먹었습니다. 달고 시원했습니다.

그 물을 마시며 근기(根機)에 대해 생각합니다. 태어나 녹은 것은 다 같은 곳이건만 어떤 곳에서 흐르냐에 따라 맑은 물로 흐르기도 하고 손에 접하기도 두려운 탁한 물로 흐르기도 합니다.

우리 또한 그렇겠지요. 태어남은 조금씩 달랐어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네 모습이 변하는 것. 누구의 삶인들 쉽고 안락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든, 더러운 삿자리에서 가시에 찔리며 태어났든 간에 제각각 지닌 삶의 무게는 모두에게 버겁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견뎌내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지겠지요.

모쪼록 우리의 삶의 모습도 그래지기를 바랍니다. 내 흐르는 곳이 탁한 석회가 섞였어도 잘 다독이고 가라앉혀 맑게 이루어 낼 수 있는 그런 삶의 경지. 그 날까지 버티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