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서 고달픈 삶 고향 이어주는 희망
타향서 고달픈 삶 고향 이어주는 희망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3.08.22 1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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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노동을 소리로 달래다-충북의 소리를 찾아서
<14> 중국 연변 정암촌사람들과 청주아리랑

일제강점기 中이주 충북 주민들 민속문화·소리 맥 이어
1992년 정암촌 방문 임동철 前 충북대 총장 발굴·소개

신철 선생 아들 성운씨 "아버지 노래 이어가고 싶어"
명확한 전승체계 없어 … 대중 보급 정형화된 작업 필요

“아리랑”은 여러 의미와 유래를 담아 전래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민요이다. 아리랑의 “아리(亞里)”는 ‘하늘나라 마을’이라는 뜻이라 하기도 하고, ‘아름답다’, 혹은 ‘곱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강은 ‘아리수’로 불렀다. ‘고운 물결’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까 뒤에 붙는 ‘랑’은 ‘낭군(郎君)’ 즉, 님을 의미한다. 아리랑은 더 많은 해석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훨씬 다양한 상상과 추리를 할 수 있다.

위부터 신영구씨(오른쪽)와 부인 이현옥씨, 신철 선생 둘째아들 신성운씨(왼쪽), 신영구씨 딸 신복자씨(오른쪽).
우리나라에 전승되고 있는 아리랑은 그 종류가 참 많다. 다양한 종류만큼이나 많은 계층의 가슴을 물들이며 불리워진다. 아리랑은 전문 소리꾼이 부르기도 했지만,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노동요로 부르기도 했다. 나무꾼들이 나무를 할 때도 불렀고, 아낙네들이 나물을 뜯으며 부르기도 했다. 방아를 찧을 때 소리를 하기도 하고, 시집살이의 힘겨움을 노래에 실어 한을 풀어내기도 했다.

청주지역에서도 전해 내려오는 청주아리랑이 있다. 의외의 장소에서 청주아리랑이 전승되고 있다.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도문시 양수진 정암촌 주민들이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일본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청주에서 중국으로 이주해간 분들이 그곳에서 청주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의 향수를 달랬다.

당시 이주 집행기구인 일제의 만척주식회사는 1년에 1만 가구 강제 이주계획을 세우고, 갖가지 감언이설을 동원해 조선인들을 만주로 보냈다. 충북에서는 청주, 옥천, 보은, 충주, 괴산 등지의 농가 180호가 만주행 이민 열차를 탔다. 강제로 고향을 등진 이들은 사흘 만에 함경북도 온성역에 닿았다. 거기서 다시 두만강을 건너 낯선 만주땅에 들어섰다. 그중 100호는 왕청현 하마탕향에 정착하고, 80호는 왕청현 춘방촌 서백림툰에 정착했다.

중국 북한의 국경지대인 두만강을 낀 도문시 양수진에서 북쪽으로 20리쯤 들어가면 청주아리랑을 간직해온 마을이 나온다. 낯선 이국땅에서 고향을 잊지 못했던 서백림툰 사람들은 1949년 서북쪽에 있는 정자바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을 ‘정암촌’으로 불렀다. 그곳엔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토록 그리운 고향 땅을 밟아보는 게 이들의 소원이건만 생전에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거나, 아직도 마음 속에 고향을 품은 채 살아가는 충북 이주민들이 남아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정암촌은 1970년대 쯤의 충북 시골마을을 옮겨놓은 듯하다. 그곳에는 충북에서도 잘 부르지 않는 청주아리랑이 충북의 민속 문화와 함께 충북의 소리로 맥을 잇고 있다. 고향을 잊지 못하고 물레질을 하거나 농사일을 하며 불렀다. 슬플 때나 기쁠 때, 놀이를 할 때에도 구슬픈 노랫가락에 고향산천을 떠올리며 청주아리랑을 불렀다.

이곳의 청주아리랑은 1992년 정암촌에 학술연구차 방문한 임동철(66) 전 충북대총장의 발굴로 충북에 처음 소개되었다. 임 전 총장은 청원군 출신 이상철(1906-1991)선생이 부르던 것을 신철(1932-1992) 선생이 배운 것이라고 했다. 가락은 강원도 자진아라리와 비슷하며 노랫말은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낙천적이고 풍자적으로 충청도 양반답게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이들에게 청주아리랑은 타향에서의 고달픈 삶과 고향을 이어주는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청주아리랑을 전승한 명창 신철 선생은 충북 보은군 장안면 출신이다. 6세에 아버지 손을 잡고 정암촌으로 간 이민 1세대다. 소리를 잘해서 연변 조선족자치주에서 주최한 노래 경연대회에서 상품으로 녹음기를 타기도 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민요집성>에 ‘뱃노래’, ‘짐배타령’ 등 그가 부른 노래가 수록돼 있다. 노인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마을에 공지사항을 전달할 때면 노래를 한 곡 먼저 부르고나서 통지를 했다. 1980년대 초에는 충북 보은군 장안면에 있는 친누나를 찾기 위해 여러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반송되었다. 뼈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던 그는 생전에 그리워하던 누나를 만나지 못하고 청주아리랑 가락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애절한 육성은 녹음으로 남아 정암촌 청주아리랑의 전형(典型)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주 1세대 정암촌 사람들에게 고향은 1930년대의 충북지역 민속문화와 함께 기억되고 있다. 정암촌에서 나와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는 신철 선생의 친동생 신영구(77세)씨는 형이 부른 청주아리랑이 녹음기에서 흘러나오자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우리 형님, 소리 참 잘했지요.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땅을 단 한 번이라도 밟아보고 돌아가셨으면 좋았을텐데….” 가늘게 떨리는 신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신씨의 부인 이현옥(75)씨도 “옛날에 많이 불렀다”며 정확한 사설과 가락으로 따라 불렀다. 눈물을 훔치며 청주아리랑을 따라 부른 이씨는 친딸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환자다. 딸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고향 노래인 청주아리랑만은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이씨는 충북 옥천군 안남면 출신이다. 1세에 어머니 등에 업혀 이민 행렬에 합류했다.

신씨 부부처럼 고향을 애태게 그리워하던 정암촌 이주민들의 애환은 저마다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 청주아리랑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이들은 1938년 이전의 훼손되지 않은 충북의 소리를 고스란히 간직해왔다. 이들에게 청주아리랑은 고향 그 자체였다.

신철 선생의 둘째아들 신성운(53)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노래를 많이 듣고 자랐다고 했다. 신씨는 “아버지의 노래를 듣게 돼 감개무량하다”며 “아버지의 노래를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건설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신씨는 아버지의 고향에 살고 싶어서 한국에 왔는데 국적회복을 하지 못해 2년 후면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의 친형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리워하던 한국에 살고 싶어서 왔다가 2년 전에 국적회복도 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신씨는 “아버지를 기억해주시는 고향사람들 앞에서 작은아버지(신영구씨)와 함께 청주아리랑을 불러보고 싶은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청주아리랑은 최근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서 열린 ‘2013 중국 두만강 문화관광축제’ 개막식에 청주농악 등과 함께 선보여 관중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청주아리랑은 현재 충북지역 국악인들에 의해 간간이 불리워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전승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가사도 여러가지 버전이 있어 대중 보급을 위해서는 정형화 작업이 시급하다. 청주지역에서는 없어진 귀중한 보석을 머나먼 이국땅에서 극적으로 찾아내 다시 복원한 만큼 청주아리랑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전승하는 일에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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