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병 달래고 … 고달픈 남의 집살이 한탄
향수병 달래고 … 고달픈 남의 집살이 한탄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3.08.08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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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노동을 소리로 달래다-충북의 소리를 찾아서
<13> 머슴살이 나무꾼 신세타령


산서 나무할 때 부르는 민요 '어사용·어생이'
일정한 곡조·가사 따로 없어 … 즉흥적 노랫말

지게 목발 두드리며 주거니 받거니 장단 맞춰
괴산 연풍면 출생 김인태씨 작은댁 머슴 소리 그리워"

머슴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머슴 밥’이라는 말은 가끔 쓴다. 밥이 밥그릇 위로 수북이 담긴 상태를 말한다. 요즘은 먹거리가 풍부해서 밥을 많이 먹지 않는다. 하지만, 머슴이 존재했던 시절에는 달랐다. 밥 외에는 먹을 것이 그리 흔치 않았다. 머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의복과 밥, 그리고 약간의 보수를 쌀 등의 현물로 받았다. 머슴이 하는 노동의 강도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밥의 양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보다 훨씬 큰 밥그릇 위로 한참 올라온 밥을 하루 5~6차례 먹었다고 한다.

고아나 무의탁, 흉년과 농촌경제 파탄으로 생계가 급박해진 건장한 남자가 머슴이 되었다. 드물게는 부부가 함께 머슴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홀아비나 청년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음력으로 7월15일은 24절기 중 백중이다. 과일 등 먹을 것이 풍부해 백 가지 곡식의 씨앗을 마련하는 시기라는 뜻이다. 또 이 날은 새로 거둔 갖가지 과일들을 준비해 조상께 올리기도 한다. 이 날 고생한 홀아비나 나이 든 총각 머슴에게 과부나 처녀와 부부 연을 맺게 하여 백중날은 ‘머슴 장가가는 날’이라는 말도 있다.

머슴들은 농번기가 끝나면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땔감을 준비했다. 다른 노동요와 마찬가지로 머슴들도 그들의 고달픈 일상과 힘겨운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고파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나무꾼 신세타령이다.

오늘의 나무꾼 신세타령의 주인공은 김인태 씨(75사진). 그는 괴산군 연풍면에서 태어난 머슴노래꾼이다.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마을에 사는 작은댁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머슴이 있었다.

그가 살던 연풍면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가 되는 곳이고 그 경계를 이루는 것이 이화령이다. 연풍면에서 이화령을 넘어가면 경상도다. 경상도에는 충청도에 가서 머슴살이를 하면 돈도 많이 주고 양반이라 인심이 좋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선지 꿈을 품고 이화령을 넘어 충북으로 머슴살이하러 오는 경상도 청년들이 많았다. 작은댁의 머슴도 경상도에서 왔다.

그렇게 남의 집 살이를 시작한 대부분 머슴들은 장가들 나이를 훌쩍 넘길 때까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며 머슴살이를 했다. 오랫동안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다가 부모의 생사조차 모르는 머슴도 많았다.

김씨 네 40여 가구 되는 고향마을에는 15명가량의 머슴이 있었다. 한 집에 2명의 머슴이 있는 집도 있었고 드물게는 3명의 머슴이 있는 부잣집도 있었다. 머슴들은 농번기에는 농사일에 전념했고, 아직 농사 시작 전인 봄에는 산에 올라 풀을 베어 퇴비를 준비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겨울에는 땔감 나무를 구하러 다니곤 했다.


1960년대 이전의 농촌마을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 불을 피워야 했다.

그 시절 땔감이란 겨울철을 나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미리미리 나뭇단을 쌓아 놓아야 했다. 집집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장작을 만들어 수북이 쌓아 놓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겨우내 사용할 땔감을 준비하는 것은 힘겹고도 고된 일이었다. 가까운 산에서는 나무를 구하기조차 힘들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했다. 아궁이에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난방을 했던 그 시절 아침저녁이면 집집마다 지붕 위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밥을 지어주고 방을 �!賤獵� 연기였다.

이런 모습은 이제 민속촌에서나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아련한 옛 정취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가스나 전기가 밥도 지어주고 난방도 해준다. 6·25 직후에는 산에 나무를 너무 베어서 민둥산이 많았다. 그래서 식목을 강조했을 정도이다.

머슴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나무를 했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산을 마주하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노래를 했다. 장가도 가지 못하고 고향에도 못 가는 서글픈 신세를 노래로 달랬다. 고향과 혈육에 대한 그리움도 깊어갔다. 산은 그런 머슴들의 마음을 달래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꼬마 김인태는 마음씨 착하고 인정 많은 작은댁 머슴을 잘 따랐다.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하러 가는 머슴을 따라가면 어린 김인태의 작은 지게에 나무를 해서 얹어주기도 했다. 저녁에는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는 머슴 옆에서 놀았다. 이렇게 배운 노래가 나무꾼 신세타령이다. 8세부터는 부산 외가로 가서 살았다. 어린 그는 산에 오를 때면 지게 작대기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던 머슴이 보고 싶었다. 그럴 때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향 모습을 떠올렸고, 머슴이 부르던 노래를 부르면서 그리움을 달랬다.

나무꾼들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가 산에서 내려올 때 지게 작대기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처럼 나무꾼이 산에 나무하러 가서 부르는 민요를 ‘어사용’ 또는 ‘어새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초부가(樵父歌)’라고 한다. 권오경 교수(부산외대)는 경상도에서 부르는 어사용이 충북 일부 지방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나무할 때 부르는 노래는 일정한 곡조나 가사가 따로 없다. 낯선 땅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나무꾼들의 서글픈 심정을 꾸밈없이 담아 신세타령 하듯 노랫말을 만들어 즉흥적으로 불렀다. 여럿이 산마루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구성진 가락은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것이 금지되고 취사와 난방이 현대화되면서 다시는 나무꾼들의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됐다.

 

동삼절 다가고 봄은 돌아 왔네 앞산잔등 초목들은 울긋불긋 푸르고

아지랑이 아롱아롱 저 먼 들판에 열두 칸 기차는

고향가자고 소리소리 지르며 가네

어쩌다 이내 신세 고향 한 번 못 가보고 타관 땅 돌고 돌아 나 여기 왔나

울고 가는 저 기러기야 우리 부모 계신 곳 알면 불초 소생 잘 있다고 소식이나 전해다오

낯설은 사람 주인 삼고 사랑 칸 내집삼아 날만 새면 지게 발목 등에 업고 살아가네

상투나 있나 죽어지니 무덤이 있나 가련한 이내 신세 가네 가네

정처 없는 세월 따라 나는 가네 오늘 여기 오신 손님 청춘가고 백발 오니 일락서산 해는 지고 적막강산 찾아오네

 

지게 지고 산을 오르고 내릴 때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고단한 머슴살이를 한탄하며 부른 노래다. 일정한 장단이 없이 3 소박 4박으로 부르다가 3 소박 7박, 3 소박 6박, 3소박 8박자로 부른다. 대부분 4음절로 부르는데 끝 음절을 잘게 흔들며 길게 늘여 불렀다.

김씨는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친자식처럼 정겹게 대해 주던 작은댁 머슴과 그분이 부르던 소리가 그립다”고 말했다. 고향에 돌아온 김씨는 20세부터 괴산읍 동부리에서 약초재배와 판매를 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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