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김갑인씨 일기와 6ㆍ25
천안 김갑인씨 일기와 6ㆍ25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3.06.25 2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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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한필 부국장 <천안·아산>

김갑인씨(1914~1976)의 일기를 읽는 것은 행운이면서도 곤욕이었다. 38년간 그가 쓴 일기는 무려 103권이나 됐다. 짧은 시간에 모두 읽어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대목만 몇 군데 훑어봤을 뿐이다. 그는 천안시 성환읍의 한 농촌(안궁1리)에 살았지만 세상사에 밝았다.

6ㆍ25를 앞두고 그의 1950년도 일기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는 일기를 한글과 한자를 섞어가며 펜으로 썼다. 한자는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도 많았다. 맞춤법이 제정되기 전이라 한글이 눈에 들어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띄어쓰기도 전혀 하지 않아 해득하기 쉽지 않았다.

63년 전의 기록을 읽으면서 글을 쓴 주인공 갑인씨가 궁금했다. ‘그’를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안궁1리, 안양마을 경노당에 들어가 그의 이름을 대자 많은 노인이 그를 기억했다.

50년대 이곳으로 시집왔다는 한 할머니. “동네에 어려운 일만 생기면, 모두들 김씨 아저씨를 찾아갔다.” 마을 주민 김영각씨(67)는 “군대를 제대하고 농사를 시작하려는데 초등학교 친구 아버지인 김씨가 도와줘 큰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일기를 읽는 동안 이처럼 꼼꼼한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피난갔을 때 등 어쩔 수 없을 때만 일기를 걸렀다.

일기는 항상 ‘갑(甲, 본인 지칭) 하루 작업, 수입금, 지출금’부터 시작한다. 하루 중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맨 앞에 간략하게 제목을 달았다. ‘1950년 6월 25일 북군(北軍) 남침’. 남침을 ‘남쪽(대한민국)이 침입한 것’으로 일부 학생이 오해하는 요즘, 그 당시 ‘남쪽을 침입’이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26, 27일 모내기를 겨우 끝내고 28일 신문을 구해 읽고 이렇게 썼다. “북선(北鮮) 인민군이 서울을 침입하여 국군이 밀리며 시민들 피해며 건물 파괴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인민군이라 호칭이 개전 초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갑인씨는 피난을 갔다 무슨 이유인지 26일 만에 돌아온다. 그리고 북한군 치하의 지방(성환) 내무서에 곧바로 감금돼 심하게 맞았다. 그 이유는 ‘한 개인의 오해 산 감정의 피해’라며 구체적으론 밝히지 않았다. 누구 때문이지도 자신의 은밀한 기록인 일기에 남기지 않았다. “항상 남을 도우면 살았는데 이런 일을 당하니 참으로 억울하다”고 한탄만 했지, 누군지 힌트도 주지 않았다.

수복 후 다시 이장이 돼 군이나 행정당국의 일을 보면서도 ‘한 개인’을 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공치하 간부를 지낸 사람들 혐의를 벗기려 동분서주한다. 경로당에서 만난 노인들이 안양마을에선 다른 데와 달리 6·25때 서로 ‘원수질 일’이 없었다고 말한 것이 이해됐다.

갑인씨가 겪었던 6·25는 부모·형제·자매 등을 잃은 사람들에 비하면 참혹스럽지 않다. 그 뒤에 서로를 위하는 민족애가 있어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인민군 치하에서 갑인씨는 4박5일 원정 노동력동원에 끌려간다. 천안 새술막(두정역 인근) 설씨 집에 거처를 정하고 10명이 복구 작업에 나간다. “(설씨 부부가) 우리에게 무한한 위안을 주었으며 자기네 식찬이 부족하면서도 일절 불평이 없었다…그 넘쳐나는 민족애에 너무 감사했다.”(50년 9월 14일) 하루는 친구가 고향에 식량을 구하러 왔다. 직접 마을을 돌며 도움을 부탁한 후, 자신도 ‘고봉’으로 쌀 한 말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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