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 임성재 기자
  • 승인 2013.05.07 1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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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재의 세상엿보기
임성재 <프리랜서 기자>

2004년 어느 날, 근무 중에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입원하셨단다. 대전의 병원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남짓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네 살 때 외삼촌의 주소하나만 달랑 들고 혼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우유배달과 온갖 허드렛 일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에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시골교회 전도사였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집안 살림과 어린 동생들의 교육을 맡아야 했다. 전형적인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셨다. 어머니와 결혼 후에도 집안 살림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듯하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은 하숙생 형과 누나들로 항상 북적였다. 그래서였는지 나의 청소년기는 반항과 방황의 시기였고, 꼿꼿하고 강하셨던 아버지는 항상 내 반항의 대상이었다.

병실에 들어선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팔순이셨지만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건강하셨던 아버지가 그곳에 누워계셨다. 링거주사를 맞는 아버지의 얼굴은 많이 부어있었고, 애써 웃음을 지으셨지만 힘은 없어 보였다. 절대 안정하라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까지 나에게 각인되어온 완고하고 강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주사를 맞지 않는 한 손으로 면도를 시작하셨다. 자동면도기라지만 한손으로는 깨끗하게 면도가 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면도기를 건네받았다. 면도를 하기 위해 아버지의 얼굴에 손을 댄 순간, 짜릿한 전율이 나의 온 몸을 감쌌다. 마치 감전된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만져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언제까지나 강한 분인줄 알았던 아버지의 얼굴은 탄력을 잃은 노인의 피부였다. 수염도 힘이 없었다. 내 마음속에 서러움이, 안타까움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 왔다. 당신의 병상에서조차 새벽마다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그 순간에 만난 것이다. 눈에서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눈물을 참으며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항심에 불탔던 시절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때까지 아버지의 얼굴을 만지고 또 만지며 계속 면도기를 돌렸다.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고백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님이 퇴원하신 후 나에게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부자지간에 이렇게 할 말이 없을까 당황스러울 만큼 통화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러셨을 것이다. 그런데 차츰 전화 횟수가 늘면서 대화가 수다 수준으로 변해갔다. 출근 후 아버지와 통화로 시작되는 하루는 기쁨과 활력이 넘쳤다. 그리고 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아버지는 차츰 더 약해지셨고, 나는 회사를 퇴직했지만 아침 통화는 계속되고 있다. 내가 회사를 퇴직한 이후에는 오히려 나를 위로하시고, 나의 건강을 걱정하신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시작한 전화통화도 결국은 나를 위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모님은 항상 그런 분이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추억의 대상이다. 멀리 떠나온 고향 같다. 그들이 쌓아온 학식이나 명예 또는 재산으로 이해되는 대상이 아니라 나이를 먹으며 살아온 내 삶의 깊이만큼 이해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지는 동경과 존경의 대상으로 변해간다. 어버이의 날, 아버지를 추억하며 나는 내 자식들에게 과연 어떤 아버지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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