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영 사진가의 한국 사진史
정인영 <사진가>
한국사진사에서의 예술사진은 개개인이 갖는 소유적 사진개념에서 생활 속의 사진으로 발전하여 다중이 향유하는 시대로 이어졌고 따라서 사진의 소유가 전람회를 통한 발표로 그 면모가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사진가들이 전람회를 열어 자신의 사진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평가 받는 자리를 만든 것은 사진예술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일대 전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작가의 사상정신이 깃든 예술의 매개방법으로 활용되었고 사진인화도 이에 맞는 시각적 형태를 띠었다.
정해창이 사진가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전람회를 개최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중요한 역사로 자리매김했다.
이에 앞서 서양화전람회는 정해창의 전시보다 일찍 열렸는데, 김관호가 1916년 평양에서 처음으로 개최했으며 1921년에는 나혜석의 전람회가 두번째로 이어졌다.
1929년 3월 29일 서울에서 사진전람회를 개최한 정해창은 개막 이전부터 각 신문들이 다투어 보도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 전시에는 4절판 크기의 사진 40여점과 전지 크기의 10여점 등 모두 50점이 걸렸는데 내용은 풍경사진이 주를 이룬 가운데 인물과 정물사진도 다수 들어있었다.
정해창의 사진은 어떤 틀에 얽애임 없이 자유분방하게 찍은 것들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을 새로운 모습으로 하여 예술성 있는 작품으로 승화시켜 보는 이들이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
특히 정해창은 평소에는 특이하게 보이지 않았던 소재를 가지고 움직이는 카메라 앵글에 의해 풍경 속에 사람이 적절하게 등장하거나 또는 삶의 모습들이 새롭게 재발견되었다는 데서 큰 점수를 받았다.
인화에서도 예술사진기법이라고 하는 고무인화, 카본티슈, 오일, 브롬오일 등 피그먼트인화를 활용하여 정해창만의 고상하고 우아한 표현을 최대한 끌어냈다.
전시작품 중 인물사진은 상식을 뛰어넘는 촬영으로 일반화된 형식이 아닌, 살아있는 개성을 표현하며 대담한 소질을 구현해 냈다.
풍경사진들에선 도심을 벗어나 시골의 강변과 어촌, 산과 들, 하늘의 구름까지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정물은 화가들의 화실에서 그려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도식적인 분위기가 아닌 사물에 스며있는 내적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정해창은 보다 많은 연구 노력의 공부로 사진가가 해낼 수 있는 모든 소실을 최대한 발휘해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추구하는 성과를 보여줬다.
정해창은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토오쿄오외국어대학에 유학, 독일어를 전공했는데 실제 독일어 보다는 금석학(金石學)에 심취하여 1945년의 광복 이후 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강의했고, 한편으로 사진예술사를 교양과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정해창이 예술사진에 뛰어든 것은 일본 유학시절 서양화와 사진화학을 취미로 하면서부터였다.
미술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던 정해창은 천단화회(川端畵會)와 태평양화회(太平洋畵會)에서 서양화를 익히고 토오쿄오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화학을 연구하면서 인화지제조법과 고무, 카본, 브롬오일인화법을 습득했다.
그 후 중국에 건너간 정해창은 동양철학과 고고학 등 금석학 연구를 하면서 비단(silk)위에 감광유제를 발라 사용하는 실크 브로마이드(bromide) 연구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정해창에게서 회화와 사진화학을 배제한 예술사진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이 피그먼트인화를 즐겨하는 이유였다.
정해창은 첫 전시를 개최한지 2년 후인 1931년 지난번 전시작품 중 10여점과 새로 찍은 40여점 등 50여점으로 두번째 개인전을 열고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대구, 광주, 전주에서 순회전도 가졌다.
3번째 개인전은 1934년 서울 소공동 낙랑다방에서 개최했는데 여기에는 인형을 소재로 한 정물사진을 걸었다.
정해창은 1939년 6월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네번째 사진전을 개최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전시가 되었다.
이 전시에서는 동양화적 사진들로 여타의 사진들 보다 한국적 감성이 깃든 작품으로 각광 받았다.
이 땅의 예술사진 역사에 크나큰 꽃을 피운 사진가 정해창은 참으로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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