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 세일러문 가방의 비극
역린, 세일러문 가방의 비극
  •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 승인 2013.01.3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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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반성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타자를 설득하는 데 필요한 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무의식적 정서, 즉 상대방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읽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표면적으로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옮다고 인정할 수는 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타당한 주장, 즉 논리적으로 옳은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실제로 움직이도록 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가 그의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은 상대방의 역린을 읽을 수 있는 수사학적 감성이 없다면 빛을 발할 수 없는 법이다.”

-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중에서-

어느 새 2013년 1월이 쏜살같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그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 서러운 50대 중반의 나이를 시름하는 사이 페이스 북에 올라 온 글의 무게가 새삼스럽습니다.

지난 해 이맘 때 쯤 이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읽으면서 독서노트에 베껴 쓴 기억이 생생한 데, 그 때의 느낌과 지금의 그것이 적지않게 차이가 나는 까닭은 아마도 참으로 오랜만에 영화를 보면서 원없이 눈물을 흘렸던 감성의 여운 때문일 것입니다.

그날 나는 아내와 손잡고 조조할인 극장에서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봤습니다. 남자인 내가, 또 5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영화를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음이 당혹스러웠던 나는 슬그머니 잡은 손을 놓고, 그 대신 손수건을 꺼내 들었습니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빛이 밝아지자 엉뚱하게도 "그러길래, 처지를 생각해야지, 그 주제에 무슨 세일러문 가방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갖는 게 말이나 되나?"라는 푸념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크게 놀랐습니다.

6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는 주인공 용구는 순수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가난합니다. 영화를 본 나는 잊었지만 영화 속 그 가난한 순수는 100만원이 채 되지 않은 월급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 뿐인 딸 예승이를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예승이가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세일러문 가방은 하나 밖에 남지 않았고, 그 가방의 임자가 된 아이는 지능과 사회적 위치, 경제적 위상 등 모든 것이 용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찰청장의 딸. 이런 극단적인 대비에서 비극은 시작되고, 그 비극은 어김없이 일방적인 폭력과 비참한 무저항과 함께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우리를 통곡하게 합니다.

강신주의 글에 포함된 단어 가운데 희망은 이 경우 너무도 무기력하고, 감수성은 아무런 필요도 없을 뿐. 오로지 ’그 주제에 감히 나의 역린을 건드려.’라는 가진 자의 분노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청문회도 미처 열어보지 못한 채 사퇴의 역린이 되고 만 새정부의 첫총리 후보에 대한 국민의 감정은 대체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식들의 재산에 대한 불편함일 것입니다.

그 와중에 대변인의 발표에 포함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보도라도 상대방의 인격을 최소한으로도 존중하면서 확실한 근거가 있는 기사로 비판하는 풍토가 조성돼 인사청문회가 원래 입법 취지로 운영되기를 소망한다"는 말은 결국 감히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에 대한 부자들 세계의 불편한 심기는 아니겠지요.

세번째 도전만에 성공한 나로호는 그것의 핵심기술이 러시아에 있든, 또 국산 발사체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청사진이 어떻든 간에 하늘에서 지구를 돌고 있겠지요.

그런 찬란한 솟구침이 지구 상공을 돌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그러나 방치된 채 굶주리는 어린 세남매와 홀로 죽음을 맞은 고독한 서러움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는데. 그 끝모르게 벌어지는 극단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래도 희망은 다가오고 있을까요. 그저 개그콘서트나 보면서 "설날이 오면 뭐하겠노. 기분좋다고 소고기 사묵겠제."나 따라하며 희희낙낙하는. 이래저래 복잡하고 속시끄러운 겨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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