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3>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33>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8.0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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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교회

신실한 믿음으로 만든 구원의 방주

농민 대상으로 교회내 야학 운영… 일반인에 '호응' "미원에서 운암쪽으로 오시다가 가파른 벼랑이 있는데 그 강 건너 마을에 있는 교회가 우리 교회입니다. 마을로 들어 오셔서 큰 은행나무 있는 집을 찾아 오세요." 기독교기획시리즈를 시작한지 10개월이 됐다. 때문일까 어디를 가든 교회종탑이 먼저 눈에들어 온다. 한국기독교장로회 봉황교회(담임목사 이동근)는 그렇게 몇 번 지나는 길에 눈여겨보았던 교회다. 시골 교회들이 다 그러하듯이 봉황교회도 눈 짐작으로보아 아주 열악한 환경임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방문하는 교회에 대해 어느정도는 알고가야 하기에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 보았으나 어디에도 봉황교회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난감했다. 그러던 중 이 교회 시무장로 김정범 장로의 부친 김교동씨가 봉황교회를 설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이른봄 찾아 뵙겠다고 전화를 했으나 바쁜철이니 좀 조용해지면 오라고 했다. 그래서 지난 7월 말 비오는 날을 택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김 장로는 누렇게 바랜 노트를 내놓았다. 봉황교회를 설립한 김교동 장로가 친필로 쓴 충북기독교 복음 과정 및 봉황교회 설립 동기와 초창기 역사가 아주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렇게 좋은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황교회의 역사자료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또한 이렇게 꼭꼭 묻혀 있는 봉황교회의 역사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음에 감사하고 뿌듯했다. "장로님 이렇게 좋은 자료가 있는데 왜 충북 기독교 역사자료집에 봉황교회가 이름조차도 없을까요" "글쎄요 난 우리 아버님께서 물려 주신 것인데 누가 나한테 그런거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고 하니 그냥 나 혼자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봉황교회 설립 및 사업
1925년 9월 30일 봉황교회를 설립한 김교동씨는 15세부터 17세까지 청원군 묵방리에서 장인 이상우씨가 설립한 청북학교를 다니며 신앙을 키웠다. 그후 본가 봉황리에 돌아와 이웃마을 즘말교회를 다니다가 10여년가량 교회를 안다녔다.

그가 27세 되던해 모친을 여의고, 29세 되던해 부친을 여의면서 고독하고 외로워 하던 중 미원초등학교 선생 송국헌씨가 고향인 청주군 미원면 운암리 인풍정 동산에 운암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이 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던 백규동 장로의 간곡한 권유로 1925년 9월 30일 김교동 장로 객실에서 주일 첫 예배를 가짐으로 봉황교회가 창립됐다.

그 후 7년 동안 가정에서 예배를 보면서 현 교회 대지를 마련하고, 1932년 4월 19일 초가 8칸의 예배당을 건축 하면서 교회는 부흥했으나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시련을 겪게 되자 교인들도 낙심하고 교회도 점점 쇠락하던 중 광복과 더불어 교회를 다시 신축했다.

한국전쟁을 비롯해 많은 수난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 발전해 1972년 5월 23일 교회 헌당과 김정빈 장로 (현 김정범 장로 형님)임직예배 및 조숙경, 김언구, 황구봉씨가 권사로 추대 되었다.

1980년 7월 22일 대홍수로 인해 마을이 위급할 당시 마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교회는 마을 사람들에게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 '노아의 방주'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또한 전국에 야학이 널리 보급될 무렵 봉황교회도 김교동씨의 객실을 이용해 사립학교를 시작했다. 교회 초대전도사 우상길씨가 신학문을 맡고, 박기호씨가 한문을 맡았다. 1년간 학교를 운영 하면서 학생이 점차 많아지자 지금 동사무실 대지에 학교 건물을 건축했다. 2년 후 내북학교 초대교장 김기형씨가 김교동씨를 찾아와 봉황 사립학교를 내북초등학교로 인도해 줄것을 요청해 그는 쾌히 승락 했다. 학생들은 봉황학교로 다니며 공부하다가 현재 창리학교로 이전했다.

농민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와 애국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교회내 야학은 3년을 1기로 정하고 진행한 바, 농민들 대부분이 국문은 다 알게 되었고, 수학도 덧셈 뺄셈은 다 할정도가되어 교회는 일반인에게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사랑으로 세운 교회

'사랑으로 세운 교회'를 교회 표어로 정한 봉황교회의 가장 큰 업적은 지난 2002년 청주시 용암동에 '권능교회'를 개척한 것이다.

권능교회는 봉황교회 출신들이 청주시에 거주하면서 다른교회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신앙심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그들에게 예배처소를 마련해 주자는 의견을 모아 봉황교회와 설립일을 같이해 9월 30일 창립예배를 가졌다. 개척 당시엔 봉황교회 목사님이 양쪽 교회를 오가며 예배를 보았으나 2006년 설립 예배를 보면서 분리됐다.

"교회가 점점 늙어가는 것이 큰 걱정입니다"라고 말하는 김 장로는 "젊은 사람들이 교회로 많이 돌아와 교회가 활기를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봉황교회설립 당시의 상황을 설립자 김교동씨는 그의 나이 88세 때 기록한 교회 약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1982년 12월 18일 토요일)

1909년만하더라도 나라의 존망이 어두웠던 시대라 집집마다 사실 우상을 섬기고 제사를 생명같이 여기며 구습에 젖어서 복음의 말씀은 아예듣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복음 전도인만 보아도 도망을 했다. 이러는 모양을 볼 때 15살 어린 나이지만 퍽이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냐 하면 청주군 북일면 북방리 청북학교를 다닐 때 학교 수업과목에 매일 한 시간씩은 성경공부 시간이 있어서 어린 나이지만 신앙심이 있는 까닭이다.

이럼으로 교회 주일학교가 필요한 것을 절실히 느꼈던 김교동씨는 유년시절 신앙이 동기가 되어 1925년 (乙丑)에 김교동 객실을 예배 처소로 정하고 동년 음 7월 29일 주일에 백동규 장로님 인도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교회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2년 후인 1932년 4월 10일에 현재 교회대지에 초가사칸을 두줄박이로 건립하고보니 기뿐 마음 금할길 없었다. 건축에 수고한 사람은 남자 김정청, 이정석, 김완옥, 장일만, 황구봉, 김교동 6인이고, 여자는 김명금, 이현자, 손순임, 김정임 등 4인 집사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의 교회탄압이 극심하여 마침내 초가사칸 두줄박이는 쓰러질 형편이 되자 다행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돼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제직회에서 결정했다. 이때 건축목재는 김정철 집사가 담당하고, 목수 임금과 기타 일절은 김교동 집사가 부담하고, 건축당시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교인이 다 낙심하고, 남은 교인은 남자 김정철, 김교동 2인 뿐이고, 여자는 김언구, 조숙경 2인 뿐인데 이 남녀 4인이 결사적으로 1947년 3월에 교회 건축에 나서 역시 4칸 두줄박이로 예배당을 지어 성도가 모이기 시작했다. 교회가 차차 부흥하면서 지난 1971년 4월 14일에 정초식을 거행하고, 현재 예배당을 건축해 지금의 봉황교회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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