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지나치던 성지·사적지는 어디?
무심코 지나치던 성지·사적지는 어디?
  • 김금란 기자
  • 승인 2013.01.28 1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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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공원 위치 야고보가 순교한 곳 '청주병영'
청주교 신자들 신앙을 증거하던 곳 '청주옥터'

오반지 등 교우들이 참수당한 '청주 읍청당터'

김사집 프란치스코가 순교한 장터 '청주장터'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의 신심을 키우기 위해 성지순례를 떠나거나 피정, 성경 완독 등 다양한 방법을 고민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무심코 머물던 자리가 성지인 경우도 있다. 인터넷 사이트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에 소개된 청주교구 성지와 사적지를 소개한다.

◇ 청주병영

청주시 남문로 2가 중앙공원 일대에 있는 청주 병영은 하느님의 종 원시보(1730~1799·야고보)와 배관겸( ~1800·프란치스코)이 장사(杖死·매를 맞아 죽음)한 곳이다.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광경을 목격한 약 50여 가족이 천주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원시보 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본래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했다.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덕행을 실천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한 것은 물론 금요일마다 금식을 했다. 그는 1797년 정사박해 때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이후 1799년 병영이 있던 청주로 이송돼 문초와 온갖 혹형을 당하다 순교했다.

◇ 청주옥터

청주 옥터는 하느님의 종 충청도 홍주의 원시보(1730~1799·야고보), 충청도 당진의 배관겸( ~1800·프란치스코), 충청도 덕산의 김사집(일명 성옥·1744~1802, 프란치스코), 충청도 진천의 오반지(1813~1866·바오로)와 경기도 수원 느지지 출신의 장 토마스(1815~1866), 삽교 지역 최초의 순교자인 덕산현 주래 출신의 인언민(1737~1800·마르티노) 등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이다.

배관겸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당진의 진목 출신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입교, 정사박해 때 한 밀고자에 의해 체포되어 청주 병영으로 이송돼 문초를 받다 순교했다.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청주 병영으로 이송돼 청주 옥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순교했다.

충청도 진천의 오반지 바오로와 경기도 수원 느지지 출신의 장 토마스, 삽교 지역 최초의 순교자인 덕산현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출신의 인언민 마르티노 등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청주 옥에서 신앙을 증거했다.

◇ 청주 읍청당터

청주 남문 밖 옛날 개울가에 있던 사형장 서운동 치명터는 옥터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형리들의 칼 아래 목숨을 잃은 곳이다.

특히, 충청도 진천 반지 마을의 하느님의 종 오반지가 청주로 이송되어 형벌과 유혹을 이겨 내며 신앙을 증거한 뒤, 목을 졸려 죽임을 당했다. 순교터인 청주 읍청당은 현재 청주 제일교회 자리에 있었다. 청주 제일교회는 1904년 미국 북장로회 서울 선교본부에서 청주 선교지부 설립을 위한 거점 교회로 세웠다.

오반지(1813~1866, 바오로)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출신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청주 병영 포졸들에게 잡혔다. 모진 문초 가운데서도 교회 일을 누설하지 않고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 되풀이하다 그해 2월 참수당했다. 청주 제일교회에는 100주년 기념비 뒷면에 순교터임을 기록해 놓았다.

◇ 청주장터

하느님의 종 김사집 프란치스코가 곤장을 맞고 순교한 장 터. 지금의 청주 석교 로터리 서쪽 한마음 쇼핑상가타운 주변 청주 장터는 하느님의 종 김사집이 곤장 80대를 맞고 순교한 곳이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해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눠 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에게 나눠 준 책들이 포졸들에게 압수됐다.

곤장을 맞고 1802년 1월25일(음 1801년 12월 22일)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목격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신·망·애 삼덕(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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