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주는 풍경
가을이 주는 풍경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2.11.05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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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연지민 취재1팀(부장)

얼마 전 자동차를 타고 무심천을 지나던 중 옆에 앉은 친구가 대뜸 물었다. “무심천에 언제 단풍나무를 심었지?”친구의 말에 창밖을 보니 뚝방에는 도열하듯 서 있는 나무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로 울긋불긋 고운 단풍에 취해 바라보다 난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단풍나무라고?”높아진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는지 친구는 눈만 깜빡이며 나무를 쳐다봤다. “단풍이 들면 다 단풍나무야? 무심천 하면 벚나무잖아. 다른 나무들은 단풍이 안드는 줄 아나보네”하고는 면박을 주었다. 그래 매일 같은 길을 지나가도 세상은 관심있는 것만 보이는 법이니까.

이는 친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다. 화사한 봄 벚꽃을 보기 위해 밤낮으로 사람들이 북적이던 무심천이었건만 한해가 가기도 전에 벚꽃은 기억에서 잊혀진다. 그냥 푸른 나무로 서 있다 빛깔을 달리하는 가을이 되어서야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것도 친구처럼 남의 이름으로 말이다.

관심과 무관심의 차이겠으나 가을이 그렇다. 관심 밖에 있던 것들이 문득 시선을 잡는다. 같은 길을 걸었을 뿐인데 가을을 입은 나무들은 곱게 치장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눈과 귀,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늘상 눈에 익숙하게 들어왔던 그 나무가 아니다. 뚝 뚝 지는 나뭇잎은 또 다른 의미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4계절을 사람의 일생과 비교해 보면 1년과 일생의 사이클이 비슷하다. 자연의 순환은 인생 과정과 많이 닮아 있어 예사롭지 않다. 봄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계절이라면 인생의 봄은 시작을 의미한다. 왕성한 여름은 청춘의 시기다. 사방팔방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덩쿨들의 생명력에서 인생의 전성기를 보게된다.

높이를 지향할 때 낮은 곳을 알려주는 계절이 가을이다.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이고, 나무는 나뭇잎과의 통로를 막아 낙엽으로 지게한다. 비움과 떠남을 말없이 보여주는 가을이 있기에 사람들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스스로 낮아지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혹독한 겨울이 오기전에 갈무리하는 법을 알게 한다.

4계절 중 3번째 고개에서 만나는 가을은 그래서 쓸쓸한 계절이고, 사색하게 만든다. 나를 돌아보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것인가로 숙고하게 한다.

뜬금없이 글이 가을로 들어섰지만 현대인들이 가을을 가을답게 느끼는 일도 쉽지 않다. 먹고 사느라, 각박한 세상을 살아내느라 가을을 느낄 여유도 없어지는 듯하다. 요즘 웃을 일이 없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생활이 사람의 마음까지 위축시켜 놓는다.

여기에 대선을 앞두고 터져나오는 뉴스들은 하나같이 어수선하고, 갑론을박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농산물가격은 치솟고 있다는데 농가는 여전히 어렵고, 전셋값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 조차 방이 없어 못얻는 현실은 이래저래 서민들의 삶과 연결된다. 당장의 현실이 다급하니 가을을 느끼는 것은 사치일 수 있다.

그래도 이 가을에 잠시 걸음을 멈춰보자. 노란 은행나무 아래에 모여있는 노란 그늘도 바라보고, 느티나무잎이 바람에 날리며 가을비로 뿌려주는 낙엽비도 맞아보자. 청주의 관문인 가로수터널 길에서 풀썩대며 떨어지는 플라타너스 낙엽을 보며 지나온 시간도 돌아보자. 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나무들이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버리고 버리며 준비하는 모습에서 내일의 희망을 찾아보자. 힘들고 지친 지금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무심천 단풍처럼. 마음의 여유를 갖고 가을에 눈길을 주자. 가을이 주는 풍경은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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