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강물
시간과 강물
  •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 승인 2012.08.09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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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비엔날레부장>

'사랑해야 한다'는 강렬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 <자기 앞의 생>은 프랑스의 작가 에밀 아자르(본명 로맹가리)가 발표한 소설이다.

그 주인공은 10살로 알고 있던 14살의 소년 모모다.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 가수 김만준이 이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노래가 발표돼 큰 인기를 끌었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라는 가사가 담겨 있는 이 노래에는 '인간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공교롭게도 이 아름답고 슬픈 성장소설의 주인공 모모와 같은 이름의 소설이 있으니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그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노래 '모모'의 영향을 받아 <자기 앞의 생>을 제쳐두고 앞다퉈 구입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다룬 <자기 앞의 생>과 <모모>는 인간의 본질을 심오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주인공 모모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는 아주 특별한 재주를 가진 소년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모에게 하나 둘씩 찾아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모모는 그런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기만 할 뿐, 그 어떤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나 모모가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이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으니,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스스로 답을 찾고, 모모의 친구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행복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행복과 긍정은 시간을 훔쳐가는 회색신사들이 도시에 나타나면서 삭막하고 차갑게 변하고 만다.

'시간은 곧 돈이다'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 명언이 되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일을 더 빨리하면서 시간의 노예가 되고, 물질적인 풍요를 만나기는 하지만 정작 자유롭게 살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기는 불행과 마주치게 된다.

시간? 중요하긴 하다.

양학선이 런던올림픽 체조 도마에서 경이로운 동작으로 금메달을 따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4초에 불과하다.

4년의 올림픽 준비훈련기간을 감안하면 1초를 위해 1년의 노고를 쏟아 부은 셈이니 시간의 위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번 런던올림픽 펜싱경기에서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길었던 1초를 생생하게 경험했으니 시간을 둘러 싼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

물이 흐르는 시간은 화양계곡을 기점으로 할 경우 서울까지 열흘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마저도 속절없다. 냇물과 강물 곳곳을 가로막은 보와 4대강 사업으로 인해 물길을 시원스럽게 흐르지 못하고 머뭇거리기 일쑤이며, 아예 물길을 막아서기 때문이다.

고인 물은 언젠가는 반드시 썩는 법. 살인적인 폭염 탓으로 에둘러 변명하지만 거대한 시멘트 조형물에 가로막혀 갈 곳을 못 찾고 있는 물은 더 뜨거워질 수밖에 없고, 마침내 시퍼렇게 녹조가 번지면서 식수를 위협하는 지경을 어찌 더위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심지어 4대강 공사를 빌미로 애써 긁어 올린 강바닥에 녹조를 막겠다며 다시 황토를 쏟아 붓는 사람들의 우매함은 또 어찌 설명할 것인가.

강물은 온전하게 흘러야 하고, 시간 역시 사람들을 옥죄며 노예로 만들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가 긍정과 여유를 통한 분별있는 쓰임이 필요하다.

시간을 제멋대로 늘리거나 줄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물 역시 회색신사를 닮은 콘크리트 장벽으로 머뭇거리게 하는 일 역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보라. 말복과 입추를 한꺼번에 겪고 난 뒤 한 풀 기세가 꺾인 무더위처럼 오묘한 자연의 절기는 때가 되면 사람들에게 잘 견뎌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는 것을.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좀 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자연의 흐름을 호흡하며 숨을 고르는 것도 괜찮을 방법일터이니. 물질적 욕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도 모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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