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와 도가니
냄비와 도가니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2.07.04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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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욕보다 빨리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라고 한다. '빨리빨리' 모습은 외국에 가서도 빛을 발한다.

수많은 인종이 모여 사는 뉴욕에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예외 없이 한국사람이고, 심지어는 가만히 있어도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사람도 한국사람이라고 한다.

출근길 도로에서 앞만 보고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마치 집단최면에 걸린 사람들이 아닌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좌우를 돌아볼 여유가 없이 앞만 보고 무작정 걸었기에 유럽에서 200년 걸릴 경제성장을 우린 50년 만에 이룰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빨리빨리' 정신을 좋게 보면 역동적이고 근면하다는 긍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으나 자칫하면 일의 갈무리를 잘하지 못하고 꼼꼼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 국민성은 '냄비근성'이라고 스스로 비하하기도 한다.

작년에 광주 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 '도가니'가 국민을 분노로 부글부글 끓게 했다.

국민의 관심이 사그라진 후 여자 원생을 손발을 묶고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 직원이 징역 7년 형을 구형받았다. 영화 '도가니'의 분노는 기억하지만 사건 결과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복지사업법이 개정돼 사회복지시설 상당수가 최근 사회문제화 된 족벌경영으로 시설 사유화의 폐단과 폐쇄성을 최소한 방지할 수 있는 안전장치로 공익이사제를 도입한 것이 그나마 '냄비근성'을 면할 수 있는 좋은 예다.

공익이사제는 사회복지법인 운영의 비리와 족벌경영 등의 폐해를 막고 시설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시·도지사 등이 추천한 사람 중에서 일부를 이사로 선임하도록 하는 제도다.

사회복지법인은 상당의 국가 보조금을 받아 운영되지만, 외부 관리 감독의 사각지대로 인권유린과 보조금 횡령 등 비리의 온상으로 국민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자격조건을 갖추지 못한 친인척을 직원으로 채용한다거나 가족전체가 운영에 참여해 독점권을 가지고 운영하는 폐쇄성은 늘 지적됐다.

그래서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침해가 가장 심각한 기관을 꼽는 질문에 인권전문가 54.4%가 사회복지시설을 꼽았다.

그 이유는 족벌경영으로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이어서 내부비리를 감추기 쉽기 때문이라고 답을 했다.

실제로 방송매체를 통해 열악한 환경에서 인권유린 등 각종 비리로 얼룩진 사회복지시설을 자주 봐 왔다. 비리가 발생하면 임시방편으로 이사장을 바꾸지만 결국은 가족에게 승계해 족벌경영을 이어가는 것이 통례처럼 되어 있다.

내년부터 공익이사제가 도입되면 정수의 3분 1 이상을 추천 받은 외부인사로 채워 재단의 전횡을 막고 운영의 투명성을 담보할 최소한의 방패막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회복지를 시작한 앞선 세대의 노고는 인정할 수 있다.

법이 허술하고 과거 방식에 젖어 시행착오를 한 점이 다소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손들이 대대손손 세습하듯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투철한 희생과 봉사정신이 필요한 일이 사회복지사업이다. 애초 취지를 벗어나 개인 사업화 해, 부를 창출하는 도구로 인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냄비가 '빨리 빨리'를 상징하는 조급함이라면 '도가니'는 쇳물을 받을 수 있는 인내와 포용을 함의하고 있다.

조급함을 안으로 담아내 바쁘게 가지만 노둣돌처럼 사회적 약자가 딛고 설 발판이 되는 법 제정에 관심을 둔다면 역동적인 모습과 은근한 모습을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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