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사두(saddu)를 만나다 <14>
인도에서 사두(saddu)를 만나다 <14>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2.05.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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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범의 지구촌풍경
윤승범 <시인>

바라나시 미로는 세계에서 알아준다는 곳입니다. 한 모퉁이만 잘못 돌면 어디가 어딘지 모릅니다. 계속 제자리를 뱅뱅 돌다가 결국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빠져 나오든, 돈을 털리든 하게 됩니다. 물론 빠져나오는 경우가 더 많지요.

인생도 그럴듯 싶습니다. 정해진 길이 없고 주어진 통로가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저마다의 몫입니다. 그 좁은 미로의 길을 늙고 여윈 소 한마리가 어슬렁거립니다.

그 뒤를 소만큼 늙고 야윈 여인네가 따라다니며 소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리자 소가 푸짐한 똥 한 덩이를 떨어뜨립니다. 소똥을 냉큼 받아서 양재기에 담습니다. 그것을 이겨 벽에 붙여 말려서 연료로 씁니다. 지저분한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자연적입니다.

인공으로 만든 것은 썩지 않아 악취를 풍기지만 소가 먹고 배설한 그것은 자연으로 나와 자연으로 갑니다. 일러 윤회라 합니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담아주는 일회용 그릇도 예쁩니다. 바나나 잎을 틀에 찍어서 작은 그릇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담아 준 음식을 먹고 바닥에 버리면 소가 다니면서 양식으로 먹습니다. 어느 것 하나 거리를 더럽히는 것이 없습니다. 덥고 인구가 많은 나라 인도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이유를 거기서 봅니다.

윤회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내가 머물러 사는 이곳의 모든 것이 흐르고 돌아 다시 사는 삶을 누립니다. 어느 종교의 교리가 옳다고는 말 못합니다. 그러나 일회용 그릇에서부터 소똥에 이르기까지 돌고 도는 삶. 그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바라나시 화장터를 뒤로하고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노인분들이 낡은 돗자리를 깔고 줄 늘어 앉아 계시거나 누워 계십니다. 그 분들 앞에는 저마다의 동냥 그릇이 놓여져 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힘든 생을 소진하고 새 삶으로 가는 희망으로 앉아 있습니다. 삶은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선인의 말이 기억납니다.

죽음을 기다리며 동냥을 청하는 노인네들의 눈빛은 지쳐 보입니다. 가난한 나라 인도에서 살았을 가난하고 지친 삶의 흔적을 그분들의 눈빛에서 읽습니다.

노인네들은 손을 내밀어 동냥을 청하거나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그냥 앉아 있을 뿐이고 앞에는 깡통 하나, 허름한 담요, 지팡이 하나가 전부입니다. 그 앞에 앉아 물었습니다.

'왜 여기 계시나이까?

'이곳이 내 마지막 죽음의 장소라네. 자식들 다 키워 놓고 평생을 모은 돈으로 차비를 하여 왔다네.'

'여기서 죽으면 어찌 되나요'

'이렇게 동냥으로 모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 둔다네. 짜파티 한장이면 육신의 배고픔이야 가시는 것. 이제 더 무슨 영화를 바라겠는가?'

'그래도 늙마에 편히 지내시는 것이 낫지 않나요'

'삶은 이미 끝났네. 이러다 나 죽으면 누군가 내 모아 둔 돈으로 장작을 살테고, 그 위에 나를 눕혀 줄거네. 그리고 어머니의 강인 갠지스 강에 나를 던지겠지. 내 육신이 그렇게 뿌려지면 다음 생에 더 나은 삶으로 나겠지. 혹시 또 아나? 이 거추장스러운 윤회를 멈출 수도 있으니. 내 삶은 이제 여기서 멈출 것이네. 삶이 멈추면 죽음도 또한 멈추겠지.'

'그럼, 저분들이 모두 그러한가요?'

'다들 그렇지.'

'생(生)이란 불꽃 같지. 타오르다 꺼지는 것. 그리고 거기에 몸을 던지는 것도 있는 법. 생이란 브레이크가 없는 불타는 마차와 같다네. 욕망과 열망에 앞뒤를 모르고 내닫는 마차. 그 불타는 마차가 언덕을 질주하지. 그리고 그 불길이 꺼졌을 때 생이 무모했음을 깨닫는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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