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사두(saddu)를 만나다 <10>
인도에서 사두(saddu)를 만나다 <10>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2.04.19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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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범의 지구촌풍경
윤승범 <시인>

갠지스 강둑에는 수천 년 365일 24시간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타올랐고 오를 것입니다. 너른 땅에서 끝없이 시체를 싣고 오고 장작을 쌓고 태우고 버리고 또 태웁니다. 저렇게 몇 천 년을 이어 왔습니다. 쉼 없이 시체를 태우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삶이 부질없고 죽음의 허망함을 배웁니다. 저절로 철학자가 된 듯합니다. 사느라 아등바등했지만 죽어 한 줌 흙으로 남으니 헛되고 헛된 삶이 더욱 헛됩니다.

가까운 화장터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태양도 뜨겁고 불길도 뜨겁습니다. 어디를 가도 뜨겁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냥 앉습니다. 시신 한 구가 또 들어 옵니다. 황금색 나일론 싸구려 천에 싸인 시체가 들것에 실려옵니다. 시신 위에는 하얀 꽃을 얹고 새끼줄로 감았습니다. 맨머리로 자른 상주가 시신을 갠지스 강물에 담급니다.

망자의 앙상한 윤곽이 물에 젖어 드러납니다. 할멈인지 할아범인지 알 정도로 앙상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죽음을 감추는 우리네 방식과 달라서 망자를 욕되게 하는 것도 같으나 저것도 문화의 차이러니 생각하면 나무랄 것도, 흉 볼 일도 아닙니다. 갠지스강에서 태워질 수 없는 사람은 아이와 이방인과 '사두' 뿐이랍니다. 아이는 죄가 없으니 그냥 버릴 뿐이고, 사두는 업을 다했으니 태울 필요가 없고, 이방인은 불가촉천민보다 아랫것이니 태울 수 없다고 하는데 영어가 짧은 릭�:邦� 한 말을 영어가 짧은 내가 들었으니 그 의미는 적실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그리 알아 들었습니다.

영혼이 떠난 시신들이 태워질 순서를 기다려 정렬해 있습니다. 상주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데 이 나라에서 흔하지만 귀한 소들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옵니다. 소가 시체를 싸맨 새끼줄을 뜯어 먹습니다. 새끼줄이 풀리며 시신이 드러납니다. 소가 더 뜯어 먹습니다. 시신이 조금 더 많이 보입니다. 모른척 하고 있던 화부가 그제서야 소의 엉덩이를 부지깽이로 툭 쳐서 쫒습니다. 소가 힐끗 화부를 무심히 쳐다보다 어슬렁거리고 갑니다.

땡볕에 반쯤 익은 시체가 제 순서가 되자 나뭇단 위에 올려집니다. 상주는 몇 백 루피의 돈을 주고 수천년 꺼지지 않았다는 갠지스강의 불씨를 사 와 불을 붙입니다. 시신을 에워싼 장작이 타오르고 열기는 가득 차오릅니다. 상주는 시체 곁을 두어 번 둘러 보고는 뜨거운 열기를 피해 그늘로 숨습니다. 남겨진 화부가 부지깽이로 시신을 뒤척거립니다. '왜 빨리 안 타나 빨리 태우고 다른 시체도 구워야 하는데'하는 마음으로 시신을 뒤척거립니다, 가만 보고 있자니 시체의 온 습기가 모두 배로 모입니다. 배가 부풀어 오릅니다. 화부가 부지깽이로 배를 쿡 찌릅니다. 배에 뭉친 물들이 삐육~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옵니다. 그렇게 시신이 타는 동안 상주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살아서도 외로움은 벗을 수 없습니다. 죽어서도 우리는 혼자입니다. 카론의 뱃사공이 이제 망자의 유일한 동행일 뿐입니다. 절망도 위안이 된다는 것. 우리네 인생은 그만큼 외롭습니다. 절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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