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아! 죽지마라
애들아! 죽지마라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2.04.18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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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제철 만나 화려한 자태를 선보이는 만개한 꽃을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바람에 흩날리며 떠날 때를 알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꽃잎의 행방을 쫓는 것도 즐거움이 된다. 핌은 사라짐을 전제로 하고 꽃은 열매 맺기 위한 성숙의 시간이다.

꽃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한겨울 아팠을 나무의 시간보다 잠시 잠깐 눈을 즐겁게 해 주는 화려함에 넋을 잃은 사람의 시간이 지배한다. 꽃비처럼 분분히 사라지는 안타까움에 행락객은 분주히 나무 곁을 서성이며 찰나의 시간을 마음에 담고자 한다. 아름다움의 만끽은 순간의 만남이다.

돌아보면 아름답지 않은 생명이 아닌 것이 없듯 세월을 묵혀 현재와 마주 선 모든 것은 신비로운 존재다. 꽃이 떨어짐은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키우기 위한 순환의 과정이다. 그래서 한처럼 맺힌 응어리가 부풀어 올라 한때를 살고 사라진다고 슬퍼하지 않는 까닭이다.

지는 것은 꽃잎만이 아니었다. 아파트 20층에 매달리다 지는 꽃잎처럼 삶을 공중에 던진 영주 중학생의 아픈 소식에 마음이 먹먹하다. 까마득한 밑을 보며 어찌 그리 맹랑하게 자신을 던질 수 있을까? 우리는 또 얼마나 이렇게 아이들을 아파트 밑으로 밀어내야 한단 말인가?

벚꽃 만발한 무심천 가를 지나며 미안함과 야속함에 이유없는 분노가 솟아난다. 아름답다며 벚꽃가지를 잡아 흔들고 꺾어 쥐고 가는 사람들도 미워진다. 이 모두 어른들이 못난 탓이다. 어른들이 잘못해 만든 사단이다. 살아보면 별것도 아닌 알량한 지식 나부랭이를 강요하고 엄청난 무엇이 있는 것처럼 꿈이라는 이름으로 너의 삶을 가둬버린 우리 어른들 잘못이다.

애들아! 죽지 마라. 친구를 괴롭히지 마라. 지나보면 봄풀처럼 여린 마음을 지닌 똑같은 사람들이다. 천하에 남은 없는 법이다.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살을 찌워 몸을 키운 것은 모두 남의 것으로 이루어진다. 생각의 반 또한 남의 것을 빌려 내 것으로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는 꽃을 피우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자양분으로 변화된 수많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넉넉함이 있기에 꽃이라는 절정을 맞이할 수 있다. 죽음과 희생이 또 다른 생명이 되는 이유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던 친구를 죽음으로 모는 어리석음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살펴봐야 한다.

'장난이었다.'라는 가해 학생의 말 한마디가 변명이 되기에는 남겨진 사람의 고통과 앞으로도 그렇게 죽어가야 하는 청소년이 많다. 괴롭힘을 당해도 말할 수 없는 환경. 애들은 그렇게 크는 거야 하며 방관자로 돌아서 버린 어른들. 문제가 생기면 축소하고 덮어버리기에 급급한 학교. 벌떼처럼 일어났다가 슬그머니 관심을 접는 언론들. 학교 교문에 붙어있는 말처럼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행복하고 즐거운 학교'가 될 수 없을까?

그러나 아직도 친구들의 폭력과 따돌림에 괴로워하며 죽음을 고민하며 등 떠밀려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들이 많다. 투신하기 전 자신을 괴롭힌 친구에게 '너 내 장례식장에 오면 죽일거야 꼭.' 생의 마지막 순간에 절규와 분노의 화살을 친구에게 쏠 수밖에 없는 우리 환경을 되짚어 봐야 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미래에 대한 이상을 꿈꾸며 사는 아이들은 그 존재로 이미 빛을 발하기 때문에 한 저자는 아이들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고 했다. 누군가의 장난으로 가지가 꺾여나가는 것처럼 이유 없는 장난에 고층아파트 난간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을 학생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냉엄한 현실이다.

명문대와 출세라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속에 아이들을 몰아넣은 환경을 바꾸지 않는다면 다음차례 학생을 기다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를 새싹이 대신하듯 아프게 떠난 그 친구의 자리에 다시는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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