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사퇴, 길었던 나흘…
이정희 사퇴, 길었던 나흘…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2.03.2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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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이재경 부국장(천안)

실기(失機). 버텼던 나흘이 너무 길었나. 한 보수 석간신문이 23일자 1면에 '무자비할' 정도의 제목을 달아 톱기사로 다뤘다. '정의'에 등 돌린 이정희. 내용 역시 자비는 없었다. 부제만 봐도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친절한 기사였다. '룰 어기고 자기 합리화', '오후 후보 등록 강행', '국민 정치 불신 심화', '양당 연대 사실상 붕괴' 등.

지난 17일 민주통합당 후보와의 서울 관악을 야권 단일 후보 경선에서 승리했던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43)의 악몽은 사흘 뒤에 시작됐다. 20일 한 네티즌이 트위터에 이 대표 캠프에서 여론조사 조작 시도를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파문은 컸다. 그러나 이 대표는 이를 '재경선 거리'로 보고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사퇴 요구에 대해서도 후보 등록을 강행하겠다며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신문 1면에 '정의에 등돌린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오보(誤報). 후보 등록을 할 것이라던 신문의 예단은 틀렸다. 그는 결과적으로 정의-부정선거하고 후보 등록했다는 개념의-에 등 돌린 정치인이 되지 않았고, 같은 날 오후 후보 사퇴 기자회견을 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움직였다. 그는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의 요청으로 22일 이 후보와 만났다. 문 이사장은 이 대표를 설득했다. 제3의 후보를 통합진보당에 주겠다고 제안했다. 명분은 꺼져가는 야권연대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것. 결정적으로 이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대선 승리후 역할분배론 등 협상이 있었을 거란 생각도 하고 있다)

득실(得失). 울먹이고 힘들어했지만, 결과적으론 얻은 게 훨씬 많았다. 이 대표 입장에서 말이다. 고뇌에 찬 '용단'으로 꺼져가던 야권 연대를 살린 영웅이 돼 화려하게 컴백했다. 4.11 총선에서 승리하고, 연말 대선에서 야권 연대의 정권 탈환이 이뤄진다면 1등 공신은 이정희가 되는 분위기다.

그는 후보 사퇴 후 얼굴이 밝아졌다. 24일 관악을 선거구에서 유권자들을 만나 활짝 웃었다. 25일 국회 귀빈식당에서의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두 당 지도부 회동에서도 그랬다. 한명숙 대표와 함께 얼싸안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 대표는 그와 포옹한 후 "지난 일주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이 대표의 큰 결단으로 얽힌 실타래가 풀렸다"며 추켜세웠다. 화기애애했던 이날 수뇌부 회동의 주인공은 단연 이 대표였다. 벌써 트위터에는 대선 승리 후 이 대표가 장관에 기용될 것이라는 야권 지지자들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정의(正義). 이 대표는 처음엔 후보직 사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의에 등 돌린 사람이 됐다. 스스로 부정(不正)했던 여론조사 조작 시도를 인정하고도 끝까지 후보로 나서려 했던 결과다. 실기했지만, 그의 결단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유력 대선주자와의 딜로 인한 사퇴라고 의심하고 싶지도 않다. 공정한 게임을 바라는 유권자, 국민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 대표의 사퇴에 가장 큰 작용을 했다고 믿고 싶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 정치상으로 네 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그중 마지막이 정의 사회 건설에 기반이 될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오는 총선이 부정없는 '페어 게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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