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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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27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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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
원수지간으로 지내는 이들을 보거나 내가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원수들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의 원수들은 대부분 한 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거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도 멀리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 삶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멀리서 던지는 비수는 옆구리를 스치지만 가까이에서 던지는 비수는 가슴을 찌른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누구에게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가를 생각해보면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가 가장 오래가고 치유하기 어렵다. 미워하지만 복수할 수 없고, 용서하고 싶지만 너무 내 삶의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비난은 하루가 기분 나쁘지만, 친한 친구의 비난은 증오를 일으키고 복수를 준비하게 됩니다.

친구와 이웃 간의 미움은 자식들까지 원수가 되게 합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원수는 사랑해야 했거나 사랑받아야 했던 사람들에게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실패가 원수를 낳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없애는 길은 다시 사랑하는 방법 밖에 없어 보입니다.

다시 원수를 사랑하려면 우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계속 계발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용서의 힘이 부족한 사람은 사랑의 힘도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 다음 원수의 악한 행동 즉 우리에게 상처를 준 행동이 결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사람의 인품은 두 마리가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쌍두마차와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바오로 사도도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차원의 원수의 관계는 사회적 갈등 구조에서 파생되기가 쉽습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를 살펴보면 분단의 상처가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합니다.

분단으로 인한 갈등은 그 파괴력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매일 금방이라도 전쟁을 할 것처럼 서로를 공격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더 사랑해야할 이웃에 대한 애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못한 죄에서 시작되는 불행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때는 총과 칼로 싸웠지만 그 전쟁이 남긴 상처와 고통이 우리 민족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경험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화해를 위한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더 풍요롭고 힘 있고 가진 것이 많은 편에서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면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더욱 번영하게 하실 것입니다. 평화의 기초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북한의 주민과 정치인들을 우리의 동포로 인정해야 하고 그들이 살아온 사회주의적 삶도 인정하는 넓은 아량은 가졌으면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평화는 강한 힘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희생에서 온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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