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풍경- 산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 5
베트남 풍경- 산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 5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2.01.1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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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범의 지구촌풍경
윤승범 <시인>

밤늦어 떨이를 외치며 다니는 과일 행상 아줌마가 온다.

어떨 때는 포도를, 때로는 귤을, 갖고 다니는 그것은 제철 과일이거나 제철 야채다. 땡볕에 하루 종일 시달렸기에 과일은 축축 늘어졌고 아줌마의 걸음은 한참 지쳤다.

우리집 앞을 지나가다 눈길이 마주친다. 눈길이 마주친 순간 안 사고는 배길 수 없다. 두어 봉다리 정도 되는 것을 사달라고 안쓰럽게 쳐다본다. 내 입에 포도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포도를 사라고 조른다. 사겠다는 마음을 먹기까지의 눈길이 마주치는 시간은 너무 길다.

'까짓, 몇 푼 안 되는 돈이니까 사주자' 가격을 묻는 순간 내 말은 듣지도 않는다. 커다란 비닐봉지를 꺼내서 무턱대고 담는다. 살살 다루어야 할 포도가 다 찌부러진다. 아금받게 저울에 단다. 그리고 소리친다.

'남무이엥' - 싼 가격은 아니다. 그러나 사기로 했으니 산다. 아줌마는 후딱 도망가듯 가고 나랑 포도 봉다리만 남았다.

봉다리를 푼다. 포도는 반 넘게 상해있고 그나마도 눌려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안 사기로 독한 마음을 먹는다.

며칠 뒤 다른 물건을 들고 온다. 안 산다. 또 쳐다본다. '이번에는 안 그렇겠지, 사자' 똑같은 절차가 이루어지고 아줌마는 갔고 봉지 열어 먹을 수 있는 것 조금을 골라내고 버린다. 이젠 안 산다. 그러나 그렇게 단골로 팔아 놓고도 미안해 하는 기색은 없다. 여전히 처량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땅콩 장사가 지나간다. 찐땅콩은 달콤하고 부드럽고 고소하다. 술안주로 좋다. 독한 데낄라를 소금 안주로만 마시기에는 쉽지가 않다.

작은 깡통을 들고 다니며 깡통으로 계량해서 판다. 한 깡통을 2백원에 사 먹는다. 한 번 먹고 다 못 먹으면 다음날에 버려야 한다. 맛은 있지만 오래 보관이 어렵다. 그래서 조금씩 자주 사 먹는다.

한 번은 집사람 보고 사 놓으라고 했더니 나 모르는 사이에 한 깡통을 천 원에 팔고 갔다. 후다닥 내려가니 저만치 가서 보이지 않는다.

다음날 또 팔러 왔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실쭉 웃으며 지나간다. 그리고는 끝이다.

결국은 땅콩장사는 천 원어치를 끝으로 단골 하나를 잃었다. 나도 이제 땅콩은 끊었다.

사는게 그렇다. 끝없이 연민을 갖고 사는 것. 살다 보면 똥 밟을 수도 있고 횡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구리 낯짝에 물을 부어도 말똥말똥 쳐다보는 후안무치는 견디기 어렵다.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는 것은 올챙이만도 못하다. 개구리도 아니다.

산다는 것을 생각한다. 어렵게 산다고 해서 후안무치(厚顔無恥)가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은 어렵고 힘들다.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막 살아도 된다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어렵게 살아보지 않았다면 그런 말도 무의미하다. 굶주려 보지 못한 자들이 '가난'이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어느 한 쪽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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