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한 선비정신이 깃든 환유적 시를 읽고
고고한 선비정신이 깃든 환유적 시를 읽고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1.11.22 1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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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스위트홈(sweet home)이 있다. 분주한 일상에서도 잊히지 않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어 그것을 수시로 기억하고 회상한다. 다른 누구도 알 수 없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마음의 고향이다. 사람의 근원적 속성에서 비롯되고 자리 잡게 되는 고향은 연어의 본향과도 같은 것이어서 이방인의 가슴에 남아 회귀의 꿈으로 절절히 들끓고 있다. 그것은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기도 하고 그리움이 태어나는 공간이기도 하며 자신만의 은밀한 희망이기도 하다.  

김동엽 시인이 펴낸 『개골산의 아침』이라는 시집을 읽었다. 시집에는 시인의 스위트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시집의 제목도 『개골산의 아침』이지만 지명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시집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성인봉, 옥천, 금구천, 울목, 남산, 독도, 구절사, 갯골, 노고단, 백두산천지, 사량도, 등용폭포, 여심이골, 두만강, 구룡연, 상팔담, 고리산, 난계국악당, 내연산, 십이폭포, 신흥동, 울산바위 등 시의 소재로 등장하는 유명 무명의 수많은 지명들은 시인의 마음속 그리움의 대상들이자 시인이 여행을 즐겨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집의 시들은 시인의 발로부터 출발해서 눈을 거쳐 가슴 안에 고여 있다가 다시 솟아난, 경험의 샘터에서 퍼 올린 여행의 기억들이다.  

얼마 전에 읽은 한기채의 『지명을 읽으면 성경이 보인다』라는 책을 떠올렸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성경은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이 놀라운 일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곧 성경이다. 그 시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하나님의 가르치심과 사랑과 돌봄의 이야기가 인물, 장소와 사건으로 만나 바로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이 책은 ‘지명’이라는 키워드로 성경 속의 역사와 주요 사건을 보여주는데,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장소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지명에는 지명에 얽힌 사건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지명들을 따라가다 보면 성경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게 된다. 성경 속의 주요 지명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의 주요 사건들을 풀어내면서 입체적으로 성경을 읽어내는, 일종의 ‘지명강해서(地名講解書)’이다. 

김동엽의 시집 『개골산의 아침』은 이방인들의 가슴을 또 한 번 울린다. 여행가가 쓴 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나 “지명을 읽으면 성경이 보인다”고 말하는 한기채와 같이 지명으로 하여금 마음의 스위트홈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환유적 등가물이지만 이 또한 현실적인 욕심 없이 살아가는 고고한 선비정신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것 하나조차도 내 것 없는 빈 허공’은 무소유의 일면이기도 하다. 소유욕을 버린 자리라는 게 어떤 자리일까. 모든 불행은 무언가를 가지려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지 않는가. 가지면 행복해지는가. 아니다. 더 큰 욕망의 노예가 되어 더 큰 것을 가지려는 욕심으로 살아가니 불만과 불행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 속의 삶이다. 어쩌면 시인은 현대인들의 불행이 이와 같은 지나친 소유욕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를 극복하고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우리 전통의 선비정신을 되찾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하다.  

선비정신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으면서 여행을 좋아하는 김 시인은 언뜻 방랑시인 김삿갓을 연상케 하는 풍류객 같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활 시인이었고, 문학적으로도 모든 욕망을 초월한 세계적인 선(禪) 시인인 김삿갓은 개화 초기의 시대적인 희생자인 동시에, 한평생을 서민들 사이에서 그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살아온 서민 생활의 거룩한 고행자였다.

한 권의 책 속에서 인생을 생각하며 늦가을의 깊은 서정에 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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