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갑(甲)이고, 누가 을(乙)인가
누가 갑(甲)이고, 누가 을(乙)인가
  • 정태일 <충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승인 2011.10.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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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는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민의 삶을 편안하게 하여 행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가 바로 선 국가의 국민은 잘 살 수 있으나 정치가 어지러운 국가의 국민은 고통에 시름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국민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치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정치를 말하는 데 있어 누구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명제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과연 이것이 실천되고 있는가. 역설적이게도 현실에서 이런 명제가 실천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왜 현실의 정치에서 누구나 동의하는 정치에 대한 기본 명제가 실천되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정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 국민과 정부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국민과 정부 모두가 정치에 있어 누가 갑(甲)이고, 누가 을(乙)인지에 대해 착각을 한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를 말할 때, 국민이 갑(甲)이고 정부가 을(乙)이라고 배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것이 역으로 작용한다. 정부는 위에서 국민을 통제하는 것이 정치라고 여기고, 국민들은 아래의 입장에서 정부가 하는 통제를 당연히 받아들인다. 어쩌면 민주주의가 가장 잘 실현된다고 자부하는 미국의 대통령도 갑(甲)과 을(乙)에 대하여 상반된 이야기를 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해 줄 것을 바라기에 앞서 내가 국가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고, 링컨 대통령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최선이라고 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가 갑(甲)이고 국민이 을(乙)이다. 반면에 링컨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이 갑(甲)이고 정부가 을(乙)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정부가 갑(甲)이고 국민이 을(乙)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데, 이는 짧은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있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정부는 갑(甲)의 위치에서 민주적 절차나 법을 무시한 채 국민을 윽박지르고, 국민은 을(乙)의 위치에서 민주적 절차와 법을 성실히 지키면서 정부의 통제에 따르는 형국이다. 이명박 정부는 갑(甲)의 입장에서 항상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라고 항변하면서 을(乙)인 국민은 정부를 믿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정권 초기에 논란이 되었던 ‘한반도 대운하’는 ‘4대강 살리기’란 명칭으로 추진되었다. 많은 국민들은 ‘4대강 살리기’가 ‘4대강 죽이기’가 될 수도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국가를 위해 필요한 사업이라면 순차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의 의사는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정부의 로드맵에 따라 추진해 지난 22일에 ‘4대강 살리기’ 완공행사를 했다.

정부가 갑(甲)의 입장에서 국민을 설득했을 경우에 갑(甲)의 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면,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래 갑(甲)이었던 국민은 을(乙)인 정부에 저항하여 자신의 위치를 찾고자 노력할 것이다. 정부는 기억해야 한다. 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재스민 혁명도, 미국에서 시작한 반월가 시위도 정부가 갑(甲)으로 한 정책들에 대한 을(乙)인 국민의 저항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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