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말생 비리를 감싼 세종, 옳았는가
조말생 비리를 감싼 세종, 옳았는가
  • 조한필 부국장<천안·아산>
  • 승인 2011.10.25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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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조선 태종·세종대에 조말생(1370~1447)이란 신하가 있었다. 요즘 인기인 TV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장원급제한 수재로 고속 승진을 거듭했으나 큰 굴곡을 겪었다.

세종 8년(1426년) 56세로 8년째 병조판서를 지낼 때, 대형 비리사건에 연루됐다. 희대의 사기범 뒤를 봐 주고 뇌물로 노비 24명을 받은 죄였다. 당시 노비는 큰 재산이었다. 우의정이 받은 뇌물(노비 15명)보다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비리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상한 건 세종의 태도였다. 처음엔 대로(大怒)했다. “대신으로서 이러한 일을 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으니 작은 문제가 아니다.”, “조말생처럼 지신사(비서실장 격)로부터 병조판서까지 10여 년간이나 오랫동안 정무를 잡은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서둘러 심문하지 않은 대간(감찰·탄핵 임무의 신하)들을 꾸짖기까지 했다. “어찌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권력 있는 사람이 관련돼 있다고 즉시 다시 추궁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다른 신하들이 죄가 크다며 사형을 주장하자 세종은 조말생을 감쌌다. 그가 태종 때부터 한 일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공로가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라 안위에 관계된 탁월한 공을 세운 것도 아니며, 다른 신하에게도 어찌 그 정도의 공로가 없겠습니까?” 대사헌은 세종 책임론까지 들먹인다. “권세를 빙자해 뇌물을 받아들이고, 돈을 받고 관작을 팔아도 아무런 꺼림이 없었던 것은 성상께서 특별히 대우했기 때문입니다.” 또 우(右)사간은 “신하에게 큰 죄가 있으면 임금이라도 사사로이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말생의 죄는 죽여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끝내 유배를 고집해 살려주고만다. 그나마 2년 후엔 형(刑)을 면해주고, 또 몇 년 후 직위를 찾아줘 후일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한다. 그래도 눈치가 보였는지 재상 반열에 올리진 않았다.

세종은 그 이듬해 일어난 황희·맹사성 비리 사건 때도 비슷하게 처신했다. 황희가 맹사성을 시켜 자신의 사위 살인죄를 덮으려는데 세종이 직접 의금부에 재조사를 시켜 전모를 밝혔다. 세종은 둘을 파직시킨 10여 일 후 다시 재상으로 기용했다. 병 주고 약 주는 식이다. 세종만의 용인술(用人術)로 보면 될까. 경계심이 잔뜩 들게 한 후 용서해 주며 “이젠 나를 위해 몸 바쳐 일하라”는 주문인가?

왕권시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우사간은 “이렇게 용서하고 징벌하지 않는다면 어찌 뒷사람이 경계하겠느냐?”며 세종을 질책했다.

최근 천안시가 의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2년 이후 10년간 공무원 77명이 기소됐다. 그중 30명이 재판을 받았고 47명이 약식기소됐다. 이 중 파직되고 퇴직금도 못 받고 쫓겨난 공무원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재판에서 수뢰, 독직 등 비위사실을 시인하고도, 또 벌금 등의 형을 받고도 지금까지 직책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들이 있다. 경미하다는 이유로 사법적 처벌을 받지 않거나 징계(또는 공소) 시효를 넘겼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법의 심판을 피해 갔다고 해서 그 죄를 흐지부지 넘겨서는 안 된다. ‘쇠고랑 차지 않고, 시효가 지났다’고 관청이 이를 묵인하면 되겠는가? 인사에서 불이익을 주든지 ‘뒷사람’이 늘 경계하도록 어떤 식으로든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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