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으로 얼룩진 역사 위에 희망의 새 역사 쓰는 사람들
갈등으로 얼룩진 역사 위에 희망의 새 역사 쓰는 사람들
  • 엄갑도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1.10.2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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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갑도의 발로쓰는 발칸반도 여행기
<18> 코소보 사태로 파괴된 건물과 성 사바 교회

베오그라드 시내 前 국방부·육군본부 건물 내전 참상 간직한 채 방치

2차 세계대전·냉전시대 거쳐 2007년 외부공사 완성된 성 사바 교회

상처 치유하고 행복 원하는 세르비아 국민 현실 반영하는 듯 느껴져

칼레메그단 요새 겸 공원을 감명 깊게 살펴본 후 다시 시내 관광에 나섰다. 국회의사당, 티토의 대통령궁이었던 '백색궁전, 국가 주요기관 등을 살펴보면서 시내를 주유(周遊)하는데 차창 밖으로 폭격으로 무너져 내려 폐허로 변해버린 건물더미가 보였다. 어제 베오그라드로 들어오면서 본 흉측한 건물이었다. 코소보 사태 내전 당시의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전 국방부와 육군본부 청사란다. 건물외부를 뚫고 들어가 내부에서만 폭발한다는 특수탄인 나토(NATO)의 스마트포탄 세례를 받은 것이라 한다. 이 건물 이외에도 시내 몇 군데에 폭격을 받아 흉물로 변한 이런 건물들이 더 있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왜 이렇게 방치하고 있을까.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두고 있다는 설도 있고, 철거할 예산이 없어 방치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폭격으로 무너져 내려 폐허로 변해버린 건물더미는 전쟁의 잔혹성과 비극성을 말해 주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왜 미국과 서유럽 국가 중심의 나토군이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폭격했을까? 그리고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가? 1980년 티토가 사망한 후 흔들리기 시작한 유고연방은 1987년 밀로세비치가 집권하고서 솟아나는 민족 간 종교 간의 갈등을 억누르고 大세르비아 재건의 꿈을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코소보는 1974년부터 유고연방의 하나의 자치주로 유지되어 왔었는데, 1989년에 밀로세비치 대통령이 자치권을 박탈하자 이에 반발하여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총파업을 계속하고 자치권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강경주의자들은 코소보의 독립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고연방의 주축세력이던 세르비아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코소보는 총인구 약 230만명 중 알바니아인이 77%이고 세르비아인이 13% 정도였기 때문에 실제로 알바니아 국가와 다름없었다. 이 알바니아인들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 1998년 3월 코소보의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코소보 사태가 발발하게 되었다.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즉각 반격에 나서 반군과 반군지역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는데 여기서 '인종청소'라는 무자비한 작전을 감행하자 알바니아계가 게릴라전으로 대응하여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미국과 유럽연합은 평화안을 제시하였으나 양측에서 모두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인종 학살 행위가 계속되자 미국과 나토군은 일방적으로 세르비아에 폭격을 감행했다. 78일간의 폭격으로 세르비아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밀로세비치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를 국제형사재판에 회부했다. 코소보는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2008년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세르비아의 통치에서 벗어났으나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국제연합 내무행정단(UNMIK)이 통치하는 자치주로만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코소보에는 현재 평화유지군이 주둔해 있다.

다시 오슬로보데니야 대로를 따라 아름다운 시내 풍경을 구경하면서 성 사바 교회를 찾아갔다. 오슬로보데니야 대로변 옆에 있는 큰 공원 안에 우뚝 솟아 있는 성 사바 교회가 있었다. 잘 가꾸어진 공원에는 수많은 베오그라드 시민들이 나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마침 성 사바 교회를 찾아온 중학생들의 한 무리가 떠들썩하게 장난치며 지나가기에 그들과 함께 기념 촬영도 했다. 티 없이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그들을 보면서 그들의 세대에는 계속 평화가 있기를 빌었다. 성당의 정면에는 작은 인공호수에 분수까지 만들어 놓아 아름다운 공원의 자연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이 성 사바 교회는 세르비아 최초로 대주교를 지낸 성인 사바(1175-1236)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그는 세르비아 중세시대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1235년에 불가리아의 제2왕국의 수도 벨리코투르노브에서 사망했고, 그곳 수도원에 묻혔다가 1237년 세르비아 수도원으로 그 시신을 옮겨 왔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1595년 오스만투르크의 장군 시난 파샤에 의해 그의 유골은 파헤쳐져 불태워지는 수모를 당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모방해서 성 사바 교회가 1935년 처음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공산주의 정권 치하에서 공사가 중단되었고, 그러다 공산주의 세력이 약해진 1985년에야 다시 공사가 시작되어 1989년 돔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2007년에야 외부 공사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외관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나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구경했다. 내부 공사도 많이 진척되고 있었다. 기둥은 비닐에 싸여 있었고, 아직도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이 교회가 완성되면 세계에서 가장 큰 정교회 교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건물 중앙에 있는 돔의 높이가 지상 70m, 메인 돔에 금으로 도금한 십자가의 길이가 12m, 총높이가 지상으로부터 82m에 달하는 건물이 된다고 한다. 외벽은 흰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꺼번에 1만2,0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성가대는 800명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참으로 웅장한 교회였다.

오늘 우리는 나토군의 공습으로 흉물스럽게 파괴된 건물, 그 속에서 전쟁의 잔해를 보면서, 베오그라드의 시민들은 오늘도 평화로움 속에서 행복과 번영을 찾아 살고 있지만, '코소보' 사태로 빚어진 인종-종교 간의 갈등과 분쟁은 아직도 그들에게 현재진행형의 모습으로 보이고 있음은 내 잘못된 인식일까. 처참한 내전, 항상 발칸반도 화약고의 중심에 있으면서 사상 초유의 인종 청소론으로 세계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결국은 처참한 폭격의 역사를 경험한 세르비아 국민들에게 이 웅장한 성 사바 교회가 완공되는 날,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더 이상의 불행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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