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니 표 송편
울 엄니 표 송편
  • 반숙자 <수필가>
  • 승인 2011.09.0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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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숙자의 느낌이 있는 창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오곡백과 무르익고 보름달 휘영청한 추석을 일러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옛사람들은 말했다. 어찌 보름달뿐이랴. 나누고 어울리는 추석만큼 마음이 넉넉해지는 때가 또 있는가.

어머니는 추석이 가까워지면 솔잎을 따서 씻어 말리고 참깨를 볶고 팥이며 동부를 수확하여 송편소를 준비하였다. 물김치와 김치를 담그고 제기를 꺼내 손질하고 부엌바닥에 거적을 깔아놓고 놋그릇을 닦았다. 그리고 대청에다 맷방석을 깔아놓고 맷돌을 앉혀 엿질금을 타고 팥과 녹두를 탔다. 치마꼬리에 불이나도록 밭으로 부엌으로 다니며 준비를 하는 모습은 어느 때보다 생기 차 보였다.

추석 이삼일 전에는 분꽃이 피어나는 어스름에 그동안 틈틈이 지어둔 식구들의 추석빔을 죄다 꺼내 화단 위에 널어놓고 이슬을 맞힌다. 개밥바라기별이 뜨는 저녁 평상에는 손잡이가 길쭉한 손다리미에 숯불이 벌겋게 피어난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불러 평상에 앉히고는 졸지 말고 잘 붙들라고 당부를 한 후 다리미질을 시작한다. 아버지의 바지저고리부터 시작해서 삼촌 것, 언니 것, 그리고 맨 나중에 내 옷 차례가 온다. 어머니 것은 없다.

이렇게 준비를 하고는 열사흘 저녁이면 떡쌀을 담갔다. 떡쌀 이야기가 나오니 무대전환을 해야겠다. 여기까지는 내 유년의 추석 모습이다.

시어머님은 떡 욕심이 많았다. 떡쌀을 한 말 담가 방앗간에서 빻아 오면 그때부터 송편 빚는 일로 하룻밤 하루 낮을 꼬박 보내셨다. 송편 쌀 한 말은 장난이 아니다. 한 편에서는 송편을 빚고 한 편에서는 찜통에 쪄서 참기름 발라 놓으면 그때부터 마음이 바빠지신다. 앞집에도 한 접시, 뒷집에도 한 접시 여기저기 돌리느라 바쁘고 명절 쇠러 멀리 가는 이웃들에게는 가면서 먹으라고 두 접시를 싸 주셨다. 팥고물 소에서부터 깨소금 소, 밤 소, 콩 소까지 골고루 넣어 만든 울 엄니 표 송편은 서울 증산동 우리 동네서 소문이 날 만큼 인기였다. 인기는 무조건 어머님의 것이지만 따라하는 며느리 입장에서는 지겹다 못해 진저리를 치는 고역이었다.

그러니 며느리들이 명절증후군이라는 괴상한 병을 앓치 않을 수 있겠는가.나는 그때 마음속에 다짐을 두었다. 어머님 돌아가시면 그해 추석부터 송편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어머님 96세에 돌아가시자 나는 나와의 약속을 보란 듯이 실천했다.

명절 때면 며느리들이 온다. 나는 외며느리라서 송편 한 말과 전 부치는 일로 곤죽이 되었는데, 지금 우리 며느리들은 신선놀음이다. 송편은 떡집에서 맞춰 오고 손이 여럿이니 전 부치는 일도 일찌감치 끝난다. 모처럼 모인 며느리들을 데리고 문강온천으로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오순도순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좋다. 이런 재미도 얼마나 갈지 모른다. 이제는 여유로워져서 제사음식도 맞춤형으로 배달되고 먼 외국여행가서 호텔에서 제사를 지낸다니 격세지감이나 흐르는 변화를 어찌 감당하랴. 오늘 따라 손자국 나란히 박힌 쫄깃쫄깃한 울 엄니 송편 맛이 간절하다. 넉넉하고 푸근했던 마음이 그립다. 이제라도 솔잎 켜켜 넣고 팥고물 송편을 만들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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