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립스틱
빨간 립스틱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1.09.05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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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따갑게 쏟아지는 햇살이 은혜롭다. 그 한낮의 열기에 슬쩍 묻어오는 선선하고 까슬한 바람도 기분 좋다. 서늘한 기운 짙어지기 전 어서어서 만물이 탱글탱글 영글기를 기도한다.

올해 내게 가을은 마음보다 몸으로 먼저 스며든다. 입술이 자꾸 마르고 튼다. 평소 바르던 립스틱이나 보호제를 발라보지만 효과는 잠깐이다. 자꾸만 신경 쓰인다. 어디 아프냐며 얼굴이 창백하다는 소리를 듣는 일도 잦아졌다.

평소 알고 지내는 이가 빨간 립스틱을 권한다. 올가을 유행이라며 생기 있게 보이려면 빨간 입술이 최고라고 한다. 보습기능에 자외선 차단 효과가 있다니 마음이 흔들린다. 매끈한 립스틱 고혹적인 빛깔을 발라본다. 무채색 얼굴에 물랑루즈의 춤추는 여배우 같은 입술만 낯설게 떠 있다. 강렬하다. 뜨거움이 영 자신 없다. 괜찮다고 훨씬 발랄해 보인다고 달콤한 말들이 귀를 간지럽게 했지만 머리를 저었다. 빨간색을 지우고 평소 바르던 부드럽고 약간 어두운 핑크빛 립스틱을 바르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립스틱 하나로 생생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젊어지고 발랄해질 수 있다면 모험 한 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약간의 미련이 남기도 한다.

립스틱만 발라도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립스틱 효과다. 원래 립스틱 효과는 대공황기인 1930년대 미국 경제학자들이 만든 용어다. 불황으로 소득이 줄었을 때 돈을 최대한 아끼면서 품위유지하려는 태도를 말하는데 여성들이 비싼 옷이나 고가의 제품 대신 비교적 저렴한 비용을 들이면서 화려한 화장으로 미적 욕구와 사치심을 충족하려는 심리다. 비싼 명품 화장품 대신 사람들에게 노출이 쉬운 립스틱만 사용해도 명품 화장품을 애용하는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최근 명품 쇼핑백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이야기가 방송을 탔다. 명품 브랜드를 즐기고 싶지만 경제여건이 안 되니 명품 쇼핑백으로 명품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란다. 방송 관계자가 지나는 행인의 명품 쇼핑백을 열어보니 아주 평범한 일상 용품들이 들어 있었다. 웃음이 터졌다. 명품이라지만 종이가방 하나로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도 우습고, 단지 겉모습만 보고 그를 명품 족으로 멋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어이없다. 더 황당했던 건 쇼핑백에도 짝퉁이 있는데 그도 없어서 못 판단다. 얼마 전 인천공항세관은 여름 휴가철 여행자 휴대품 특별단속을 실시한 결과 명품 핸드백 적발자가 전년에 비해 18%나 증가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느냐에 따라 경제적인 능력을 파악하고 그 사람의 내면까지 명품일 거라 여기는 풍조에 걱정이 앞선다.

개인의 경제적인 능력으로 명품을 즐기는 일에 사족을 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삶을 바라보는 잣대가 다르고 행복을 느끼는 가치가 다름을 인정해야 하니까 말이다. 다만 명품으로 치장하는 외면에 어울리게 내면도 명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빨간 립스틱 덕에 이야기가 길어졌다. 립스틱 효과가 아니어도 뜨겁고 생생한 모습을 가지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고민한다. 속 깊이 익어가는 햇과일처럼 달달하고 향긋한 사람냄새를 가진 명품이 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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