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시대 약진 역사변화의 심볼 '우뚝'
민주주의 시대 약진 역사변화의 심볼 '우뚝'
  • <전 충북중앙도서관장>
  • 승인 2011.08.18 18: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엄갑도의 발로쓰는 발칸반도 여행기
⑫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1)

스테파피델리아 광장 약수터 로마때부터 시민 건강水 이용

과거 공산주의체제 상기 9월9일 광장·레닌광장 등 볼거리

이슬람사원 명맥 바냐바시 모스크·교통수단 노란전차 눈길

어제 벨리코투르노브에서 약 3시간을 달려(240의 거리) 오후 8시 30분경에 소피아에 도착했다. 비교적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아침에 가벼운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은 아침 산책을 생략하고 식전에 소피아에 관한 역사와 오늘 관광할 관광 명소들을 한번 훑어보기로 했다. 내가 가진 자료들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소피아는 BC 8세기경 트라키아 부족인 세르디족이 이곳에 일찍이 정착했다. 이후 BC 29년 로마인들이 이곳을 정복해 세르디카라고 불렀다.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강성하던 6세기 유스티니아우스 황제가 성 소피아 교회를 건축한 후, 후에 복구된 이 교회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소피아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도나우강으로 흘러드는 이스쿠르강의 두 지류가 시내를 흐르고 있고, 비토샤 산의 높은 봉들이 도시 주위를 둘러싼 아름다운 산림의 도시로 물맛도 좋고 공기도 좋은, 표고 550의 고원 도시라고 한다. 지리적으로 아드리아 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라 한다.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소피아는 1877년 러시아와 투르크 전쟁으로 러시아가 승리하자 러시아에게 점령됐고, 이듬해 불가리아 인에게 넘어가 1879년 불가리아 수도가 됐다. 오늘날 불가리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인구는 약 120만 명, 공원과 녹지가 많은 아름다운 도시 소피아는 시내 도처에 지난날의 번영을 말해주는 많은 유적과 돌로 포장된 도로가 남아 있다. 시내 곳곳에는 이슬람 사원과 그리스 정교 사원이 서 있고, 과거 공산주의 체제를 상기시키는 '9월 9일 광장', '레닌 광장', '러스키 거리' 등이 볼만한 거리로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는 호텔에서 맛있는 아침 식사를 하고 8시 30분부터 시내 관광에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은 한없이 푸르고 아침 햇살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거리는 생각 외로 조용한 분위기였다. 우리가 처음 안내를 받은 곳은 천연 온천수가 로마시대부터 쏟아져 나왔다는 스테파피 델리아 광장에 있는 야외 약수터였다. 여러 개의 수도꼭지를 통해 온천수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대가도 보상도 필요 없이 소피아 시민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였다. 소피아 시민들은 이 온천수가 위장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물이라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일등공신으로 여긴다고 한다. 오늘도 소피아 시민들은 물통에 물을 받아 가고 있었다. 우리들도 마음껏 받아 마셨다. 물맛은 뜨끈 미지근했다. 먹기에 딱 알맞은 온도였다. 우리도 가지고간 생수병에 한 병 가득 담았다.

약수터에서 넓은 공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바로 눈앞에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소피아에서 유명한 바냐바시 모스크라 한다. 1576년 오스만투르크 제국 지배 당시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 중의 하나라고 한다. 소피아에는 과거 70개에 달하는 이슬람 사원이 있었으나, 현재는 바냐바시 모스크만이 이슬람 사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바냐바시라는 이름은 공중목욕탕을 의미하는 경구로부터 유래되었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최고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이 설계했다고 한다.

이 사원은 거대한 돔과 하늘까지 치솟은 첨탑이 일품이었다. 이 모스크 뒤에는 터키마을이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눈을 들어 건너편 쪽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큰 건물이 보이는데 로마시대부터 있었다는 목욕탕이라고 한다. 터키식 목욕탕의 원조라 한다. 지금은 수리중이라고 했다. 공원 벤치에는 노인 몇 분이 앉아 담소를 나누며 즐기고 있었다.

다시 백화점을 끼고 대로로 나오니, 이 거리가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의 최고의 중심가이며 쇼핑가인 비토샤 대로라 한다. 주요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복잡한 틈 사이로 지하도를 찾아드니 입구에 반 지하식으로 지붕만 나와 있는 오래된 작은 교회가 있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지배 당시인 14세기에 건축됐으며 소피아에 남아 있는 중세교회 중의 하나라고 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 지배 당시 투르크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지하에 지어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외부는 타일에 덮여 있어 볼품이 없으나 내부는 매우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고 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한 당시 소피아 시민들의 눈물겨운 인고와 고통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았다.

지하도를 지나 밖으로 나와 거리 한복판에 서서 눈을 올려보니 바로 소피아 여신상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1989년까지는 이곳이 레닌광장으로 중앙에 러시아 혁명가인 레닌 동상이 서 있었는데 지금은 이 소피아 여신상으로 교체됐다고 한다. 여신상의 한 손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부엉이를, 또 한 손에는 명성을 상징하는 월계관이 들려 있었고, 머리에는 황금의 관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황금관을 쓴 여신상이 화사한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이름 높던 레닌 광장에 레닌 동상을 흔적 없이 철거하고 소피아 여신상으로 교체하면서 지하철이 관통하고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복잡한 거리로 변해 있었다. 공산주의 시대가 가고 민주주의 시대로 약진하는 역사 변화의 심볼처럼 느껴졌다.

다시 동방 정교회로 유명하다는 성 네델리아 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데 우리들 눈앞에 노란색의 전차가 유유히 달려가고 있지 않는가. 전차가 사라진 지 오래된 우리와 달리 아직도 전차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풍경을 이곳 소피아에서 보니 또 다른 느낌이 밀려온다. 50년대 말 시골에서 살다가 부산에서 땡땡 소리치면서 달리는 전차를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신기하였던가. 그리고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있었던 추억이 이제 낭만으로 그리워지고 있지 않은가. 그 시절 나는 참으로 가난한 청년으로 외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