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침묵
  • 오창근 <칼럼니스트>
  • 승인 2011.08.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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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오창근 <칼럼니스트>

인디언들은 낯선 사람을 만나면 십여 분 동안은 침묵하며 그 사람의 영혼에서 울리는 소리와 느낌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고요한 침묵 속에 응시하며 영혼의 울림에 관심을 둡니다. 이렇게 관조하는 습관은 대자연을 살아 있는 어머니 품으로 보는 우주관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자연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다는 사고에서 시작된 직관의 능력은 끊임없이 자연과 교류하며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자연을 경외한 그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을 만나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입이 가벼워지고, 별 관심도 없는 삶의 이력을 들추어내는 데 익숙한 우리네 삶을 돌아봅니다. 침묵은 많은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침묵은 표현이 응집된 또 다른 대화법입니다. 넉넉한 맘으로 상대를 바라다보는 따뜻한 시선만으로도 타인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표면에 드러난 모습만 보고, 섣부른 판단을 하기도 하고 때론 삶의 이력이 포장되고 미화되는 경험도 종종 합니다. 존재하는 자체가 대화이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줄 아는 것 또한 교류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지루한 장마와 간혹 보이는 폭염에 우린 지쳐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변화에 짜증과 분노를 쏟아낼 때가 잦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원인의 제공자는 바로 우리가 아닙니까 침묵으로 말하는 자연의 대화법이 칭얼대던 우리의 입을 부끄럽게 합니다. 안으로 쌓여 밖으로 넘치는 물처럼 깊이 담지 못한 생각이 쏟아져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절집 사람처럼 묵언 수행을 통해서 쏟아내는 말보다 안으로 주어 삼키는 연습을 해도 좋을 듯싶습니다. 안으로 쌓인 웅혼한 기상을, 내면 가득 담고 산다면 이 또한 바른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한 방법입니다.

생각해 보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먼지바람 같은 것에 너무나 많은 생각을 소진하고 살지 않아나 합니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을 담아 두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게 해도 꾹꾹 눌러 담아 단단해지고 농익을 때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불가마에 달궈진 황토가 비취색을 띠고, 속으로 익어 안을 빨갛게 채운 수박처럼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미학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 속에 배어나는 자연스러움입니다.

말이 내 안을 헐어내어 벽이 얇아지고 구멍이 생기는 것을 느낄 때 참을 수 없는 회한이 찾아듭니다. 두서없는 말과 쭉정이 같은 말이 돌아다니며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타인의 약한 부분을 도려내는 것 또한 슬픈 일입니다. 뿌리박고 천 년을 사는 느티나무의 그늘에서 세월을 덧입고 살아온 긴 침묵을 봅니다. 장구한 자연의 시간 앞에 가끔은 소리 없는 사람이 되어 묵언의 참뜻을 한 줄 배워 와도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세찬 소낙비가 내리는 날. 먼 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마저 빗소리에 잠겨 침묵하는 날이 많았으면 합니다. 덥다고 투덜대고 산과 들로 달아나기에 바쁜 8월의 한낮에 말을 아끼고 곱씹어 생각의 그릇을 넓히는 시간이 길었으면 합니다.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에 홑이불 끝자락의 까칠까칠한 촉감을 느끼며 성큼 다가선 가을을 볼 때가 머지않았습니다. 올 때 오고, 갈 때 가는 자연의 순환에 호들갑 떨던 미안함이 있습니다. 자연의 변화는 불현듯 다가온 것이 아닌데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솜털에 이는 작은 바람결에 실려 올 가을을 기다립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속으로 자란 생각이 오월의 볍씨처럼 탱탱한 생명을 품고 있음을 안다면 침묵을 통한 여름나기는 훌륭한 또 다른 피서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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