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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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6.0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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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종족번식을 위한 자연 발생적인 사랑과는 다른 형태의 사랑을 의식적인 사랑이라고 규정을 하였다.

그는 의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일어나게 되며 이 때는 사랑 자체가 통합적인 힘이 된다고 했고, 필자는 이 통합적인 힘은 문학이나 음악, 미술에 있어서 걸작을 창조해 내는 커다란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의식적인 사랑은 나눠 주기만 할 뿐 소유하려고 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자유스럽게 하고 상대방의 자유를 통해 역시 자유스러워진다.

의식적인 사랑을 교류하는 두 사람은 궁극으로 가는 동반자가 되고 서로를 돕게 되며, 고통과 번뇌 행복과 침묵 등 모든 것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정신적으로 교류할 수 있으며, 서로의 일을 기탄없이 털어 놓을 수 있고, 어떠한 일이 닥쳐도 서로를 돕고 신뢰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 선할 때나 악할 때나 화를 낼 때나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서로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변함없이 서로를 사랑해 주리라 믿을 수 있는 이러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랑은 투명하며 무조건적이다.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이 의식적인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며,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랑은 정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정신적으로 교감되는 것만큼 육체적인 행위를 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상은 ‘날개’라는 소설을 통해서 지나치게 정신적인 사랑으로만 치닫는 것도 또 육체적인 행위만을 탐해도 절름발이 사랑이라고 얘기했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를 연구한 오쇼라즈니쉬는 사랑이 없는 육체적 행위는 추하게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

정신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육체적 행위는 조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아마도 창녀가 추하게 보이는 이유는 사랑이 없는 육체적 행위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추하고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상품화된 사랑 없는 섹스에 열광하며 빠져들게 되고, 이러한 현상은 TV에서 교묘하게 섹스를 광고에 이용하여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고 있으며, 인터넷에서는 사랑도 없고 대상도 없는 인터넷 섹스가 우리를 무감각하게 하고 추하게 만들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은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잃어버려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버튼을 누르거나 클릭만하면 힘 안들이고 가짜 사랑을 취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창조의 능력과 힘을 사장시키게 한다.

문학가나 혹은 음악 미술가 의 훌륭한 작품과 삶의 뒤에는 남다른 사랑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죠르드 상드와 쇼팽의 사랑과 그들의 음악과 문학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회자되어오고 있지만, “운명적인 사랑의 성애가 남자와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강한 힘의 하나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라고 말한 루 살로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독일의 국민시인으로 철학적이고 고뇌에 찬 사랑의 시인이 되게 한 여자, 루 살로메. 니이체로 하여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든 여자, 루 살로메. 다음 칼럼에서 그녀를 얘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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