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
빵 굽는 타자기
  • 충청타임즈
  • 승인 2011.02.13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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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강대헌 <충북인터넷고 교사>

듣고 있던 교향곡의 볼륨을 높였습니다. 클래식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베토벤이나 말러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에 가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볼륨을 아무리 높여도, 제 언어중추신경을 건드릴 염려는 없으니까요.

오늘 제 심기는 불편의 극치를 달리고 있습니다. 비수(匕首)처럼 번뜩거리는 뉴스, 언어로 전달된 뉴스 한 토막 때문입니다.

뉴스의 시작은 이랬습니다. "단칸방에는 채 마르지 않은 수건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온기는 느낄 수 없었다. 이미 가스가 끊긴 지 오래여서 음식을 해 먹은 흔적도 없었다. 마실 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설을 앞둔 지난달 29일, 유망한 에비 시나리오 작가 최아무개씨(32·여)는월셋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세상에, '발견'이란 말이 이런 때 쓰이기도 하는군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경우처럼 어느 누구의 기쁨을 옮기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무관심으로 버려진 죽음을 발견했다는 식으로 어느 누구의 슬픔을 알려주기도 하는 데 쓰일 수도 있군요.

정말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은 죽은 최씨(최고은 작가)가 다가구주택의 다른 세입자 집 문 앞에 붙여놓았다는 쪽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그렇게 간신히 몸을 움직여서 쪽지를 붙여놓고 돌아와 자리에 누운 젊은 영혼은 얼마나 몸을 뒤척이며 흐느꼈을까요. 그리고 마침내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는 얼마나 인생이 쓸쓸했을까요. 경찰은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던 최고은 작가가 수 일째 굶은 상태에서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사전 제작(事前製作, pre-production)' 단계에서 시나리오 작가에게 계약금의 일부만이 지급되는 부조리한 시스템이란 망령이 영화계를 사로잡고 있는 한, 최고은 작가와 같은 피해자가 또 다시 나오지 말란 법은 없겠죠.

최고은 작가의 참담한 죽음을 되돌릴 순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바람만이라도 내놓고 싶습니다. 그를 '마지막 희생양(the last scapegoat)'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새빨간 거짓말과 시커먼 잘못을 대신 짊어지게 한 채 그를 찬바람 몰아치는 거친 들판으로 홀로 내몰아버린 것으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최고은 작가를 향한 영화배우 김여진의 위로가 마치 절절한 초혼가(招魂歌)처럼 들렸습니다. "저보다 어린 여자가, 동료 작가가, 차가운 방에서 굶어죽었다. 펄쩍펄쩍 뛰어도 계속 눈물이 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정말 잘 모르겠다. 아무리, 어떻게...왜..무엇이...누구, 아는 사람 없나요"

빵 굽는 타자기 두 대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군요. 한 대는 미국의 소설가 폴 오스터(Paul Auster)가 사용한 빵을 잘도 구워대는 타자기입니다. 반면에 다른 한 대는 최고은 작가의 배고픈 타자기입니다. 아무리 모질게 마음 다져 먹고 타자기를 쳐대도 빵을 구워내진 못했으니까요.

조심조심, 최고은 작가의 2006년 단편영화 '격정소나타'를 보았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속이 메슥거려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의 사회적 타살(他殺)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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