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낮아짐, 버스에서
함께 낮아짐, 버스에서
  • 오희진 기자
  • 승인 2006.05.1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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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달을 밟는 것은 사람과 공간의 관계를 바꾸는 혁명적인 행위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가지 기본 가치인 속도와 경쟁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미국인들이 페달을 밟는 순간, 이라크에서 미군들을 철수시킬 수 있다. 석유 소비량을 일거에 25% 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홍은택)

자전거가 그렇다면 내가 타는 버스는 어떤가?

봄이 오고 그 아침이 온다. 길마다 출근하는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들은 오직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하여 달려간다. 그 자동차 운전자들 말고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붐빈다. 그 중 멈춰 서 버스를 기다리는 이는 대개 학생들이다. 우리에게 3월은 봄의 도래일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버스를 탄다. 자리를 잡지 못 해도 견뎌야 한다. 이제 버스 안은 하나의 세계로 구성되기 시작한다. 그 중에 학생들이 많다. 교복을 입은 그들은 정류장을 거쳐 가면서 한 무리로 내리고 탄다. 물론 다른 이들(주로 여성)도 타고 내린다. 그 사이에 버스 안은 시 외곽에 있는 나의 학교 학생들로 채워진다. 버스는 이제 교실과 같아진다.

거기에서는 먼저 인사가 건네진다. 그것도 선생님이 어쩐 일이냐는 놀란 표정이다. 그것은  함께 버스에 동승했다는 동질감으로 이내 학생의 즐거움이 된다. 함께 낮아짐은 그래서 모두 들판의 풀이 되고 폭포 물살마다 바다로 되는 가역반응, 그 주객 전화의 고리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학생은 내게 제자리를 양보하려고 엉덩이를 들썩인다. 등교시간에 버스는 학생들로 미어지고 때로 승차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서 있는 대부분은 무시로 출발과 제동을 일삼는 버스에서 금방 피곤해진다. 자리를 양보하는 일은 그래서 예의로만 치부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느덧 교실이 된 버스에서 그것은 학생-교사의 고마운 관계맺음의 처음이다. 고맙다는 말은 여기서 중의적이다. 교사됨이 고마우며 학생의 베품이 고마운 것이다.

옆에 부대끼는 학생과 나누는 대화는 얼마나 삼삼한가? 모르는 것을 서로 알게 하고 그 지식을 권력 위계화 하는 대신 가지런히 나누는 일은 어쩌면 학생 자신의 내면의 욕망이 실현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자 이런 질문이 내 귀를 간질인다. 선생님, 이 차 타면 늦지 않는 거죠? 교사와 동승한 버스는 한 배를 탄 운명이어야 한다는 투다. 그래, 버스 밖 교통상황이 어찌되든 너와 나는 지금 함께 그 어려움을 겪는 중이며 그것은 결과적으로도 그렇다.

버스 안은 때로 학생들에게 무관심에 이르는 편승이 되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다 다른 것이 꼭 같은 것보다 좋은 일이라 편들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유목의 분위기는 한편 약탈적이어서 아쉽다. 어떤 학생은 귀에 이어폰을 끼고 mp3가 만드는 기계음에 다른 소리를 못 듣는다. 또 다른 학생은 휴대폰을 열고 엄지손가락으로 문자 정보를 주고받느라 다른 풍경조차 보지 못 한다.

자신에게로만 향한 눈과 귀는 타자와의 관계를 자기화할 뿐 소통하고 연대하는 일을 배척한다. 무엇인가 기다림이라는 인간 자신의 소명과 세상을 떠받치는 의인과 이웃에 대한 선의는 귓전에서 밀리고 손끝에서 그 시선이 멈추고 만다.  

버스는 밀려드는 승용차들에 자꾸 지체되고 있다. 차창 밖 반대 차선은 끝없이 밀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되짚어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가는’ 자전거를 성찰하듯 버스가 내 것이 되고 또 다른 본디 교실로 화하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생명의 봄과 그 순환의 아침을 일상적으로 환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봄이 오고 그 아침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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