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의 추억
제헌절의 추억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7.15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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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정규호 <문화콘텐츠 플래너>

나는 시장통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다.

늘 사람이 붐비고 그에 따라 언제나 왁자지껄한 풍경 속에서 보낸 내 유년시절의 추억은 심상치 않다.

지금도 청주지역에선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어엿하게 남아 있는 석교동 시장과, 이제는 아예 시장으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남주동 시장과의 경계 어디쯤이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그때는 닷새마다 유독 장꾼들이 몰리는 날이 있었으니, 이제는 그 명맥마저도 가물가물한 장날이 그것이다.

청주 장날은 2일과 7일이 끝자리에 서는 날로, 청주시 신봉동에 자리하고 있는 우시장은 지금도 장날의 흔적이 남아 그 날짜가 되면 어김없이 팔려가는 소들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향수를 자극한다.

느닷없이 장날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어릴 적 속상했던 기억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됐음을 털어놓기 위해서다.

지금 중년에 해당하는 세대들은 대부분 참으로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 역시 부모님께서 제법 규모가 있는 잡화점을 한 탓에 크게 궁핍하지는 않았으나, 넉넉하지는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해마다 7월이면 가정형편의 넉넉함과 그렇지 못함의 한탄보다는 장날이 내 달콤한 휴식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억울함이 더 큰 상처로 기억된다.

그때는 누구라도 그랬듯이 공부보다도 우선되는 일이 집안을 돕는 일이었으니, 하물며 장사를 하는 집에서, 그것도 장날이 되어 가게에 손님이 밀려드는데 딴 짓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관습으로 정해져 내려오는 2,7일 장날과 성문으로 정해진 제헌절인 7월 17일이 겹친다는 일은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보다 더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해마다 공휴일인 제헌절쯤이면 기말고사도 거의 끝내고 방학을 며칠 남겨두지 않아 수업도 느슨해지는 탓에 아이들은 한동네 동무들끼리 갖가지 놀 궁리를 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니 집안일에 꼼짝 못하는 처지의 내 유년시절은 얼마나 억울한가.

그렇다고 올 제헌절이 토요일과 겹치는 바람에 내 유년시절의 억울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제헌절이 태극기를 다는 국경일이기는 하나 공휴일에서 돌연 제외됐다고 얼룩진 추억을 보상받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관습으로 정해져 내려오다 지금은 사라질 위기에 놓인 장날과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고치기를 거듭했던 성문법인 헌법의 차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제헌절을 맞아 새삼스럽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노는 것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노는 것은 나쁘고,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단정하고 있다.

심지어 헤겔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도구를 써서 자연을 변화시키고 생산하여 타자와 법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사회와 국가가 형성된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런 철학적 범주에서 생각하면 내 유년시절의 제헌절 공휴일을 전적으로 집안일에 헌신한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면서, 문화가 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놀이는 결코 문화의 한 하위분야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범주일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부차적인 여가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인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7월의 땡볕 아래에서 태극기를 다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면서 '아! 내일모레가 제헌절이구나.'를 깨달은 뒤 생각이 너무 깊어졌다.

다만 노는 것도 노동도 너무 지나치면 병이 되는 법. 헌법도 그 가치가 존중될 때 비로소 존재의 이유가 있는 법. 사람들이여 즐길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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