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술 예찬
현대시의 술 예찬
  • 충청타임즈
  • 승인 2010.07.15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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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영의 에세이
김우영 <소설가>

술을 노래한 현대시는 자유롭게 표현된 형식의 위트와 기지가 돋보인다.

근대사에 마지막 기인으로 불렸던 고 천상병의 '비 오는 날'이란 시를 보자.

아침 깨니 / 부실부실 가랑비 내리다 /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 백오십원 훔쳐 / 아침 해장으로 간다 / 막걸리 한 잔에 속을 지지면 /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나.

조선일보 신춘문예 출신인 박봉우의 시를 보자. 종로 탑골 공원에서의 파격적인 결혼식을 올린 시인. '휴전선'이란 작품으로 당시 시단에 충격을 주었던 열혈 시인 박봉우가 지은 '술이란' 제목의 권주 시다. 과감한 시운의 처리가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인두 화백이 컷까지 그려준 시이다.

술이란 술이란 / 혼자서 같이 마시기 전에 / 친구와 섭섭히 하자 / 모가지를 축이는 / 모가지를 축이는 / 고달픈 하루여 / 술자리여 술자리여 / 혼자서 같이 마시기 전에 / 모든 친구와 섭섭히 하자.

여리디 여린 심성이 그야말로 상추잎 같은 온정의 눈물에 시인 박용래 '상추꽃 아욱꽃'이란 시로 술이 주제는 아니지만 술이 담긴 시이다.

상추꽃은 / 상추 대궁만큼 웃네 / 아욱꽃은 / 아욱 대궁만큼 / 잔 한 잔 비우고 잔 비우고 / 배꼽 / 내놓고 웃네 / 이끼 낀 / 돌담 / 아 이지러진 달이 / 실날같다는 / 시인의 이름 / 잊었네.

술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낭만과 멋을 유난히 추구하던 여류시인 김여정은 '모과주'란 예찬시를 지었다. 떨떠름한 모과주 맛이 물씬 풍기는 이 작품은 섬세하며 여린 여류만이 갖는 고운 필치의 작품이다.

나이 40에 / 내 돈 내고 / 그 못생기고 못생긴 / 남도 고목을 샀지 / 인생 40의 / 그 떫고 신맛 / 이제야 한도 삭을 것 같아.

지난 70년대 종로의 청진동에 '흑산도'란 술집을 차려서 문단에 화제가 되었던 시인 권일송도 술이라면 사양하지 않은 사람으로 문단에 알려진 인물이다. 오죽하면 제목부터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일까….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 떠오르는 천년의 햇빛 / 지는 노을의 징검다리 위에서 / 독한 어둠을 불사르는 / 밋밋한 깃발이 있다 / 하나같이 열병을 앓는 사람들 / 포탄처럼 터지는 혁명의 석간 위엔 / 노상 술과 여자와 노래가 넘친다 /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원로 시인 정훈의 작품도 있다.

사람보다 술이 좋더라 / 몸이 불타 이글거리면 / 내 위에 잘난 놈 없어 좋더라 / 비분보다 차라리 술에는 위엄이 있어 / 내가 술인지 / 술이 나인지 / 기인이 된 것처럼 자랑스럽구나.

이외에도 술과 관련된 예찬 시는 많다. 즐겨야 하는 술, 이 속에서 빚어지는 누룩냄새 물씬 풍기는 시. 이것도 이 시대의 산물이요, 지식인의 정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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