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망친 연극 '지방자치'
관객이 망친 연극 '지방자치'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0.04.26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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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편집부국장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취직시험 볼 때 상식문제로 자주 출제됐던 문제. 연극의 3요소는 무엇인가. 정답은 배우, 희곡(대본), 관객이다. 관객이 공연 주체와 함께 무대를 구성하고 과정을 이끌어 가는 동등한 역할을 인정받는 공연장르는 연극이 유일하다. 그래서 연극은 객석의 갈채를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여기 '지방자치'라는 연극이 있다. 연극하는 분들께 매우 송구스럽지만, 연극의 3요소를 여기에 적용하면 정치인은 배우, 정책은 대본, 관객은 유권자로 치환될 것 같다. 지역사회라는 무대에서 공연되는 이 연극이 성공하려면 탁월한 기량을 갖춘 정치인이 훌륭한 비전과 정책을 열정적으로 펼쳐내고 객석의 유권자들로부터 아낌없는 박수를 받아야 한다. 이런 모습이 지속적으로 펼쳐져야 이 연극은 롱런이 가능하다.

그러나 '지방자치'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늘 공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와 대본만 있을 뿐 관객은 보이지 않는 이상한 연극이 되고 있다. 다른 연극과 다른 것은 객석이 텅텅 비어도 공연은 계속된다는 점이다. 대학로에 이 공연이 올려졌다면 3일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텅빈 객석 앞에 놓인 어둠침침한 무대에서는 연일 막이 오르고 배우는 위선과 배신, 부패로 점철된 막장 대본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한다. 야유보다도 못한 침묵으로 객석의 능욕을 당하면서도 무대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이 연극이 그나마 관객의 관심을 끌고 존재감을 알리는 것은 화끈한 엽기극을 올렸을 때다.

최근에는 '민종기'라는 걸출한 배우가 무대에 올라 모처럼 객석을 만원사례로 채웠다.

업자에게 공사를 밀어주고 3억원짜리 별장을 선물로 받은 것은 종전 소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서 수억원대 아파트를 받은 여직원의 등장은 공중파 막장드라마 시청자까지 흡입하는 위력을 보였다. 주인공이 여권을 위조해 해외도피를 시도하다 실패한 후 잠적하면서 이 연극은 액션과 스릴러까지 망라하는 대작의 진수를 보여줬다.

바로 전 '승진뇌물'이라는 케케묵은 소재를 들고 무대에 올라 객석의 반응을 살피던 배우 '한용택'은 강력한 블록버스터에 밀려 조기에 내려오는 수모를 겪었다

물론 관객들이 무대에 보내는 것은 환호와 박수가 아니라 탄식과 짜증이다. 지긋지긋하니 이제 그만 무대를 걷어치우라는 호통이다.

그래도 연출자와 극장주는 끄떡도 하지 않고 배우들을 무대에 올린다. 객석이 차든 말든 수입은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 연극의 또 다른 특징은 개봉도 하기 전에 주민들로부터 극장 입장료를 선불로 받는 것이다. 입장권 선불 구입은 의무이고, 환불은 절대 불가다. 일부 관객들은 자신이 막장 연극을 밀어주는 스폰서이자 공모자라는 사실도 모르는 눈치다.

연극판에서 잔뼈를 키워온 한 중견 제작자는 연극의 3요소에 대해 다른 답을 내놓는다.

정답은 '관객, 관객, 그리고 관객'이라는 것이다. 관객이 객석을 찾아 무대와 함께 해준다면 나머지 두 요소인 배우와 희곡은 저절로 발전하고 진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지론대로 관객이 연극의 절대적 요소라면 연극 '지방자치'를 수렁에서 건지는 길은 관객들이 객석을 지키는 것이다. '지방자치'를 최악의 졸작으로 추락시킨 주범은 '텅 빈 객석', 바로 우리라는 자각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도 많은 관객들이 객석을 찾아가 추악한 무대에 채찍을 가할 의지도 없으면서 이 연극의 장래에 희망을 걸고 있다.

분명한 것은 관객이 객석의 권리를 포기한다면 지방자치 무대는 앞으로도 '민종기'같은 배우들이 설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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