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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10.14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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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천
오창근 <회사원>

글에도 가끔은 주렁주렁 열매가 달린다. 행간을 헤집는 날카로운 댓글에 등줄기에 땀이 솟기도 하고 부끄러움에 낯빛이 붉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오장육부를 핀셋으로 헤집어 작은 좁쌀 같은 근종도 집어낸다. 문자의 조합이 만드는 생각의 덩어리에 제거하지 못한 군더더기는 결국 정형사의 날카로운 칼날을 비껴갈 순 없듯 낱낱이 드러난다.

글을 옮겨 놓고 기다리는 시간은 감별사의 손에 생사가 결정되는 병아리의 숙명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든다. 뜻하지 않은 칭찬이 오면 받아쓰기 백 점 맞아 시험지 들고 '엄마'하며 현관문을 들어서는 초등생의 모습이 되고, 때론 뉘앙스가 주는 미묘함과 최소한의 배려처럼 던지는 예의바른 모습에 절망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글을 쓴다는 것, 말을 한다는 것은 상대를 전제로 한 행동들이다. 모든 것이 오픈되어 광속의 빠름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내뱉는 말과 글은 곧 대중의 평가와 직면하고 '선플'과 '악플'이라는 천국과 지옥을 맛본다. 말과 글에 꼬리를 다는 대중의 식견이 양날의 칼이 되어 기쁨과 좌절이라는 두 가지 인생의 굴레를 씌운다. 그보다 무서운 것이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무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밤새 쓰고 찢어버릴 연애편지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읽힘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두근거림이 좋아 글을 쓰는 줄도 모른다. 어찌 보면 금단현상이 두려운 중독일 수 있다. 아직은 날카로운 비수에 내 몸을 맡기기가 두렵다. 사고의 밑천을 드러내 발가벗겨 진다는 느낌에 알몸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많은 글을 읽는다. 남이 쓴 글의 의미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면 조심스레 칭찬의 글을 올린다. 그가 읽고 힘이 되는 까닭을 알기에 용기를 낼 뿐이다. 안으로 굵어 바깥을 키우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물이 고여 맑음을 이루고 난 연후에 타인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아름다운 댓글달기 운동본부가 생겼다. 도를 넘어선 비방과 인격 모독이 만든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건전한 토론이 아닌 쌍욕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현실의 반영이다. 비판과 비방은 다른 법이다. 틀리고 맞고의 문제가 아닌 다름과 차이의 문제인 것이다. 문명의 발달이 주는 편리를 불신과 모욕을 주는 흉기로 사용하는 어리석음이 두렵다. 악플러 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데 무감각한 시대에 아름다운 댓글은 맑은 유리창 너머로 손을 흔들며 안부를 묻는 정겨운 이웃의 몸짓이다.

댓글의 미학은 '속담'이나 '격언'이 주는 맛과 확연히 다르다. 팽팽한 실처럼 늘어져 있는 긴장감을 한순간에 웃음으로 돌려 놀 수 있고, 장구한 논리를 한순간에 뒤집어 놓는 반전도 있다. 아름다운 댓글은 속 깊은 생각이다. 그래서 전체를 이해하고 허점을 발견하는 것은 맥락을 아우르는 식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시댁에 첫 인사 온 처자가 치맛단을 내려 무릎을 덮는 조심스러움처럼 댓글은 읽는 재미가 있다. 가벼운 눈인사도 있고, 눈 질끈 감고 건네는 덕담도 있다. 소통과 공감의 세계다. 사람의 만남이 시공간을 넘어서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근황을 묻지 않아도 글을 통해서 넌 짚어 이해할 수도 있고 생각의 무게도 짐짓 달아볼 수 있는 편리한 시대에 댓글은 현대인만의 또 다른 인사법이 된 것이다. 거기에 아름다움과 멋스러움이 더해진다면 품격 있는 만남이 되어 겸연쩍게 아는 체하는 현대인들의 냉랭함보다 훨씬 더 낫지 않을 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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