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술의 미학 2
명사들의 술의 미학 2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9.17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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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영의 에세이
김우영 <소설가>
우리나라 명사들의 술의 미학은 어떨까? 화가 장승업은 그림뿐만 아니라 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예술인이다. 조선 초기의 안견, 후기의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조 화단의 3대 거장의 한 사람으로 장승업을 일컫는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재적 기질이 있어 대궐에 들어가 병풍을 그리게 되었다. 술을 워낙 좋아하는 그라, 잔만 들면 말 술을 먹어야 했고 몇 달을 계속 취해 있을 때도 있었다. 손에 돈만 들어오면 전부 술집에 맡겨 놓고 매일 마셨으며 술값도 계산을 하지 않고 주인이 돈이 다 떨어졌다하면 고개만 끄떡하였다 한다. 그는 궁중에서 병풍을 그리다 갈증이 나면, 그림 도구를 산다는 핑계로 도망 나와 임금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는 곱게 화장한 여인에게 술병을 들게하고 술을 따른 다음에야 붓을 잡고 신이 나서 잘 그렸다고 한다. 마음대로 미치광이점┻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을 추며 풍류객으로 살다가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술 주전자라고 불리는 김관식 시인. 그는 문단의 대가들이 가득 메운 자리에서 축사를 하는 박종화 선생의 마이크를 빼앗아 "박종화 군, 그만하고 내가 한마디 해야겠어요!"하며 닥치는 대로 문단의 비리를 욕했던 그의 일화는 지금껏 전해진다. 미당 서정주(동서)선생에게 대인다워야 한다고(5·16때 당당치 못했던 짓에)대들고 싸웠고, 4·19직후 용산으로 국회의원에 당당히 출마해 장면과 정면대결했던 패기만만한 그였다. 집에서 집필할 때는 천장에 주전자를 고무줄로 매달아 목 마를 때마다 그것을 당겨 마셨던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나라의 땅은 백성의 땅인데 국유지다, 사유지가 어디 있냐며 반론을 세워 종횡무진했다. 한번 술을 입에 댔다 하면 밥은 전혀 먹지 않고 보름이고, 한 달이고 폭음했던 대단한 호주가였다. 도도한 웅변력과 기억력이 좋았던 그는 천재적인 시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나귀 재주꾼 정수동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모름지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오갔던 자연인이다.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도 그의 재질을 아까워 했다. 돈과 벼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집안은 돌보지도 않고 술만 마시며 얄궂은 행동과 해학을 연출했던 조선시대의 건달이었다.

정수동이 하루는 목이 칼칼하여 친구를 찾아 갔는데 주인이 내놓은 술상에 안주가 시원치 않았다. 정수동의 심술보가 터졌다. "안주없이 어찌 술을 먹나 내가 타고 온 나귀를 잡게", "자네 갈 적엔 뭘 타고 가려나?"

"저 뜰에 노니는 닭을 타고 가지"했다고 한다. 식전 댓바람에 동구 앞 주막을 찾아갔더니 주모가 "식전 마수에 재수없게 외상술은 못 주어요."하고 쏘아붙이고는 뒤꼍으로 가버렸다. 마침 그때 돼지가 우리를 뛰쳐나와 뜰에 널어놓은 술밥(찐 쌀밥)을 먹어 치웠다. 수동이 본체만체 있노라니 주모가 큰 소리로 악을 썼다. "쳐 죽일 놈의 돼지! 보면 좀 쫓을 일이지, 구경만 하슈. 그래"정수동은 특유의 능청을 부렸다. "난, 돼지는 맞돈(현금)내고 먹는 줄 알았지." 단골 손님을 박대하는 주모를 골탕 먹인 일화다.

국어학자 권덕규씨는 시대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수업을 마치면 교무실을 나와 선술집을 매일 기웃거리며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랬다. 매일 이러다 보니 이윽고는 집을 팔아 작은 집을 마련키 위해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차츰 집 구할 돈마저 술값으로 다 날리고 마지막으로 청산주(淸算酒)를 마시고는 스스로도 기가 막혔는지 "너 이놈(집 보고 하는 말). 괘씸한 놈. 내 비록 지금껏 네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 내 속에서 살 것이다"했다니 배짱 한번 두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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