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
지천명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9.0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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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법안 <논산 안심정사 주지스님>
황금들판이 희망 자체였던 때가 있었다.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먹고 살기가 어려운 때였으므로 먹을거리가 풍요로워야 살 수 있었던 시대의 일이다. 황금빛 들녘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부른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먹고 살 빼는 일이 급선무가 된 세상이지만 말이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나선 나들이에서 보는 풍경이 너무나 싱그럽고 아름답다. 이미 강원도의 들녘은 황금빛을 머금고 있었고, 긴 시간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아직 햇볕은 따끔하지만 바람만은 어느새 가을 향을 내뿜고 있음이니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공자님은 나이 오십 세가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하셨다. 요즘에야 한갑자인 육십 세가 되어도 철이 안 드는 사람이 많고 대부분이 죽을 때에야 약간 철이 들어서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으니 세태를 풍자하는 말로서 아주 적절하지 않은가 싶다.

'Many Dimension'(다차원(多次元))이란 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윤회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적이 있는 책이다. 미국의 유명한 초능력자인 에드가 케이시가 남긴 자료를 심리학자인 지미 서미나라라는 분이 정리한 글인데,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윤회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윤회할 때마다 배워야 할 덕성(德性)과 과목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생에 모든 것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님이 아셨다는 천명이란 무엇이었을까 물론 하늘이 명령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로 나름대로 그 의미를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천명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금생(今生)에서의 배워야 할 일이나, 갚아야 할 일, 아니면 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그래서 모든 이들이 태어나 한 생을 살면서 태어난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산천을 바라보면서 내게 주어진 천명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좋은 시간이었다. 천명이란 내게 주어진 삶에서 배우고 익혀서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때 모든 인간들은 자연환경은 정복하는 대상으로만 여겼던 때가 있었다. 산을 한번 올라가도 그 산을 정복했노라고 표현하고, 미지의 대륙이나 세계를 탐험하면서도 그 대륙이나 미지의 세계를 정복했다는 표현을 썼었다. 아주 오만하고 적절치 못한 표현이 아니었나 싶다. 왜냐하면,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상생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모든 인간들의 관념이 많이 달라졌다. 환경과 내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고, 환경의 도움없이는 결코 인간이 쾌적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환경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신토불이(身土不二) 아니겠는가 원래는 불교용어로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쉽게 이야기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 따로 있고, 환경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환경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고 이제사 그것을 알아가는 인류가 기특하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오래전 어느 서양철학자의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특성에 대한 것이었다. 동양화에서는 인물화가 발달되지 않았고, 그리고 그림의 대부분을 인간이 차지하는 경우가 없이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로서 어부나 낚싯대를 매고 가거나, 아니면 산자락의 정자에서 노니는 인간의 모습이 그 전부가 되니 말이다.

그렇다. 동양의 자연관, 인생관이 바로 그랬었다.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던 소중한 가치관 말이다.

다차원의 세상에서 한 생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과 한 생마다 배워야 할 덕성이 각기 다르다는 것, 오늘 우리는 어떤 천명을 받아 나왔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봄직도 하다. 길거리엔 들국화가 피기 시작하였다. 아직 정동진의 바닷가는 여름인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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