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22일 오후 3시30분
2009년 7월22일 오후 3시30분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7.23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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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한덕현 <본보 편집인>

   미디어 관련 3개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야권에선 의원직 사퇴라는 배수진을 쳤다. 야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는 집권당으로선 가장 부담가는 '역습'이다. 대의 민주주의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 매끄럽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의원직 사퇴'라는 단어는 십중팔구 국회의 날치기 입법과 맥을 같이했다. 여권이 물리적 힘으로 법안을 밀어붙이면 야당은 늘 의원사퇴로 맞선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번 미디어법 의결 과정에서 당내 왕대비 마마(?)의 수렴청정을 유감없이 보여준 박근혜 역시 4년전엔 의원직 사퇴를 마지막 보루로 꺼내든 적이 있었다. 2005년 12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사학법 개정을 몰아치며 예산안마저 단독처리하자 박근혜는 "나를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구속하라"며 의원직 사퇴의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처럼 국회의원들에게 극단의 선택을 유혹하는 날치기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끝이 안 좋았고 때론 정권몰락이라는 비극으로까지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1979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원 제명안 처리다.

여당인 공화당이 본회의장을 옮겨 단독으로 김 총재 제명안을 의결하자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이 의원직 사퇴서를 내고 이른바 막장 투쟁에 돌입했다. 그 여파는 '부마 항쟁'을 촉발시켰고 결국 박정희 정권은 종언을 고했다.

그에 한참 앞선 1958년 12월엔 집권 자유당이 국가보안법 제정을 위해 경호권까지 요청한 상태에서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 그 후폭풍이 민심 이반을 촉발시키는 바람에 4·19 혁명의 단초가 됐다.

1986년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대한민국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다"라고 일갈한 유성환 의원의 발언을 문제삼아 여당인 민정당이 밀어부친 체포동의안 날치기는 결국 이듬해에 6월 항쟁을 타오르게 한 불쏘시개가 됐다.

또 있다. 1996년 말 여당인 신한국당이 복수노조 허용 등을 담은 노동법 개정안을 노동계의 거센 반발에도 아랑곳않고 날치기 처리함으로써 냉혹한 심판을 받는다. 법안 의결 이후 민심이 급속히 등을 돌렸고 이 와중에 한보사태와 김현철의 비리가 연이어 터지면서 한나라당은 끝내 97년 대선에서 정권몰락이라는 비운을 맞게 된다.

문제의 노동법 날치기는 현 김문수 경기지사에게도 두고두고 아킬레스 건이 되고 있다. 노동운동가로 재야 투사였던 그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이재오와 함께 YS의 품에 안겨 의원배지까지 달았지만 노동자의 대변인은커녕 날치기의 거수기 역할만 함으로써 지금까지도 그의 이미지엔 변절자 혹은 배신자라는 주홍글씨가 떠나지 않는다. 2004년 3월엔 야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노무현 탄핵안을 완력으로 가결시켰다. 이는 잘 알다시피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국민저항에 부딪쳤고 결과적으로 두 당은 총선 참패의 쓴맛을 곱씹어야 했다.

어쨌든 2009년 7월 22일 오후 3시30분부터 시작된 미디어법 통과를 위한 본회의는 대한민국 국회의 날치기 역사에 또 하나의 이름을 올리게 됐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날치기는 똑같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승자와 패자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지 향후 후폭풍의 방향이나 성격은 양측 모두에게 같은 두려움으로 엄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힘'은 얻었다고 하는 순간 그 끝도 같이 봐야 한다. 권력의 무상함을 알아야 힘에 대한 절제도 깨닫는다. 이날 거사가 끝난 후 한나라당 의원들이 소리 높여 외쳤다는 건배의 잔이 에덴동산의 무화과를 안주로 하는 성배(聖杯)가 될지, 아니면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배가 난파되는 줄도 모르고 들이마셨다는 선원들의 독배(毒杯)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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