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서울시 종로구 경복궁
  • 충청타임즈
  • 승인 2009.02.10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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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송부일의 문화재 돋보기
송 부 일

역사·낭만 팔짱낀 산책 1번지

근정문으로 들어가면 조정으로 반석이 쫙 깔리고 상월대 하월대 위에 근정전이 위엄을 떨치고 서 있다. 반석엔 동, 서로 동반(문관) 서반(무관)의 품계석이 서있다. 품계석을 좌우하여 반석위에 큰 문고리가 반석에 박혀있는데 여름에 조회할 때 나이 많은 재상들이 햇빛에 쓰러질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차양을 치던 문고리다.

근정문서부터 이어지는 조정 중앙 삼도 중 가운데 어도 따라 상월대 중간에 오르면 봉황과 당초가 그려진 큰 정방형돌이 양 계단 중간에 서 있는데 이를 답도라 한다. 답 도는 걷는다는 뜻이지만 근정전 정문부터 어도를 타고 온 연에 탄 임금님을 답도 위로 교군들이 근정전으로 모시는 건위적인 어도이다. 답도에는 봉황과 당초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궁궐 속에 왕과 민초들이 하나임을 표시한 것이다.

근정전이란 천하의 모든 일에 근면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는 것으로서 정사에 게으르지 말라는 뜻으로 근정전이라 건물 현판을 달았다 한다.

근정전은 태조 3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란으로 전소되고 그 후 고종 4년에 복원되었다.

근정전은 국보 제223호 2층 통층 구조의 지붕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목조건물이다.

다포계 공포양식에 도리가 11줄이 걸리는 11량 전각이다. 팔작지붕 용머리, 내림마루, 귀마루 양성을 하고 용마루 양 끝에 취두를 올리고 귀마루에 용두와 잡상을 두었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이 근정전은 당대의 최고 건물로 외부는 2층이나 내부는 전체가 한 공간으로 트여있는 구조가 높고 깊은 천장 중앙에 왕권의 상징인 칠조룡의 용 두 마리가 서로 엉켜 여의주를 희롱하고 그 이외의 천장은 우물 천장을 하고 있다.

창덕궁, 창경궁에는 용을 사용하지 않고 봉황으로 장식했는데 유일하게 근정전에 만이 용이 오조룡이 아닌 칠조룡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는 이어온 왕조 중 유일하게 고종이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된 황제였음을 상징한다.

근정전에서는 왕 즉위식, 세자 책봉, 왕의 결혼식, 중국 칙사 환영식 등 국가적 큰 행사만 거행하였는데 그때 왕의 복장은 면류관의 모자와 검은 구장복을 입었다. 왕비는 적의를 입는다.

근정전 뒷문이 사정전 정문이다. 사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홑처마 집의 소슬 대문 형식의 삼문이다.

이 좌우 행각 근정전 남쪽에 벽을 치고 중방 아래는 방화벽을, 중방위에는 토벽에 광창을 달았다. 사정문 양 옆으로 17칸씩 행각은 양 끝에서 만나는 28칸 동서 행각과 함께 사정전 외각을 이룬다.

사정문을 들어가면 사정전 전각이 있고, 좌우 동편에 만춘전, 서편에 천추전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보평전이라고 부르다가 사정전으로 바뀌었다. 사정전은 왕이 집무하던 건물이다.

사정전에서 북쪽의 향오문으로 들어서면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이다.

강녕전은 정면 11칸, 측면 5칸 건물로 용마루 없이 우람한 지붕이다. 그 앞에는 향오문 북쪽으로 댓돌 중앙에 월대인 석보계가 서 있다. 가끔 이곳에서 대비, 왕비, 세자가 석고대좌를 하는 곳이다.

강녕전은 임금님께서 생활하는 공간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왕실의 가족, 관료들을 편안하게 만나기도 하는 내전 중심 건물로 연침 또는 연거지소라고 부른다.

그러나 1917년 일인에 의하여 불탄 창덕궁 내전을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뜯어가 창덕궁 희정당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6년에 중건한 것이다.

강녕전에서 교태전으로 들면 동, 서로 길은 행각이 가운데 양의문의 현판을 걸고 서 있다. 음, 양 조화를 말하는 양의문 동편에 순승당 서편은 보의당이다.

양의문으로 들면 왕비의 침소 교태전이다. 교태전보다는 중전으로 알고 있는 교태전은 궁궐 중 가장 가운데 위치하여 중전 또는 중궁전이라 부른다. 그래서 왕비를 궁궐 가운데에서 사신다하여 중전마마로 호칭한다.

교태전은 세종 22년에 처음으로 건립했다. 후에 임진란이 일어나 화재를 입고 공터로 내려오다가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께 복원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4년에 새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교태전 아미산에서 벽돌로 싼 담길을 따라 오르면 월문인 연휘문이고 이어 건물 없는 공터가 나온다. 원래는 38칸 규모의 자미당 행각이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는 궁궐지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자미당 남쪽으로 24칸의 인지당이 있었으나 이 역시 궁궐지에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공간은 왕실 생활공간으로 바느질, 음식을 만든 시설들이 있던 곳이라 하는데 전각이 전쟁과 화재로 사라지고 북동의 자경전, 북쪽 위로 함화당, 집경당이 남아 있다.

여기서 자경전으로 오르면 자경전 아름다운 꽃담이 나와 매료된다.

이 꽃담에서 앞을 보면 자경전 지붕합각의 꽃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또한 자경전 뒤뜰의 보물 제810호 굴뚝이 아주 특이하다.

십장생인 해, 달, 구름, 바위, 불로장생의 영지, 산, 물, 소나무, 학, 거북 등을 그려놓아 자경전의 대비의 안녕을 병풍으로 수놓은 듯하여 흐뭇하다. 자경전은 고종이 왕실의 어른 조대비를 위해 옛 자미당 터에 지은 건물이다.

1873년 화재로 손실되어 바로 복구하였으나 1876년 또다시 화재로 불타서 1888년 고종 25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른다. 자경전은 대비의 침소이다.

자경전은 44칸 정면 10간인데 네발대 기단위에 네모난 사다리형의 높은 주추석을 놓고 네모난 기둥 방주석를 세웠다. 기단 앞 층계를 비켜선 자리에 동자루를 세우고 네모난 받침위에 삿된 무리를 물리치는 서수 한 마리를 올려놓았다. 오르면 자경전에서 꽃담 뒤 서북쪽으로 함화당, 집경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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