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만난 여걸들 2009년은 나의 해
물만난 여걸들 2009년은 나의 해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2.3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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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손맛' 절망속 희망을 낚다

'웰빙&찬' 허미자 대표


지난 2004년 남편 직장 잃어
연립주택 처분후 전셋집 전전
설거지 등 생계전선 뛰어들어
맛보기 홍보성과 2005년 오픈
음식 조리후 손님맞는게 행복

"밥만 하세요."

'웰빙&찬' 허미자 대표(44)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물론 자신의 영업을 위해 끌고 다니는 승합차에도 그녀의 가게 벽에도 붙어있는 이 문구는 그녀를 절망에서 건져올린 구세주이기도 하다.

허 대표는 현재 6명의 직원을 거느린 반찬가게 사장이다. 단골손님만 2000~3000명을 확보하고 있는 그녀는 청주사창시장에서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통한다.

보은이 고향인 그녀가 결혼과 함께 터를 잡았던 사창동에서 사업을 하게 된 연유는 지난 2004년 남편의 실직때문이었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당시 전세집을 전전하다 결혼 20여년만에 장만한 24평 연립주택까지 빚으로 넘기는 위기상황을 맞았다. 당시 그녀는 "땅이 꺼진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실감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대학생이던 큰 아들(태형)과 대학진학을 앞둔 작은 아들(태봉)이 엄마의 짐을 덜겠다며 함께 군입대하겠다고 말했을때 말릴수가 없을만큼 벼랑끝에 서 있었다"고 말했다.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나면 박차고 오르는 길밖에 없다고 하던가. 그녀는 식당, 주방, 설거지, 뜨개질 등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됐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놀러온 지인에게 대접할 것도 마땅치 않아 차려준 밥상이 그녀의 운명을 바꿔놓는 반전의 기회로 작용했다.

"친정어머니가 음식솜씨가 뛰어났어요. 그 손맛을 이어 받았는지 봄이면 나물뜯어다 말리고 여름이면 오이소박이 담는 등 음식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날도 평소 먹던 반찬 몇가지 내놓았고 그 언니가 불쑥 던진 "이 정도 솜씨면 반찬가게 내라"라는 말이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어요. 그만큼 절박했거든요."

그날 이후 그녀는 밑반찬 몇가지를 만들어 시장, 아파트, 원룸단지, 영세 식당 등을 다니며 '맛보기' 홍보활동을 펼쳤다. 손 맛에 대한 자신감으로 무점포 배짱 영업을 했던 그녀는 지난 2005년 10월 드디어 사창시장에 42 규모의 반찬가게 '웰빙 & 찬(饌)'을 냈다. 하루 120가지 반찬을 판매하는 그녀의 음식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녀의 사업원칙은 가족이 먹는 음식이라는 생각을 갖고 국산식자재와 천연조미료를 사용하는 것과, 조리된 음식은 덤으로 주더라도 그날 모두 소화시키는 것이다. 천차만별 고객의 입맛에 맞춰 조리해 주는 것도 그녀만의 노하우다.

반찬사업을 시작했을때 그녀의 첫 하루 매상은 5만원이었다. 3년이 지난 현재 그녀의 하루 매상은 180만원에 이른다. 사업을 시작한 후 4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다는 그녀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된다. 재래시장에서 구입한 신선한 식재료로 음식을 조리한 후 오전 8시 손님을 맞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웰빙&찬'은 최근 전국소상공인협회 시장경영지원센터가 선정한 우수점포로 선정됐다. 실직의 아픔을 딛고 남편과 함께 가게를 꾸리고 있는 그녀의 꿈은 장독대처럼 이름있는 반찬전문점을 만드는 것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 기적일군 '3전4기' 오뚝이 인생

대성산업개발 조진숙 대표

43세, 열정·무모함으로 첫사업
비데 제조로 억대 매출 달성도
대기업 동일업종 뛰어들어 부도
건설업·파이프납품사업도 실패
절망끝 친구 도움으로 재기 성공

(주)대성산업개발 조진숙 대표(53)는 금녀의 벽으로 알려진 건설 자재 납품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직원 7명을 거느린 그녀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3전4기 오뚝이 인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직장생활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이 남편의 월급봉투로 안정된 생활을 하던 1998년, 그녀 나이 43세 때 열정과 무모함을 무기로 첫 사업에 손을 댔다. 그녀는 지인이 운영하던 비데 제조 공장을 인수했다. 당시만 해도 비데는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지만 좀 산다는 부유층에게는 필수품으로 통했던 용품이었다. 사업 초기 2~3년은 연매출 억대를 올리며 장밋빛인생이 펼쳐질 듯했다. 하지만 대기업이 동일 업종에 뛰어들면서 그녀는 보기좋게 넉다운됐다.

"중소기업에서 만든 제품이 돈이 된다 싶으면 대기업은 가만놔두질 않아요. 메이커에 약한 소비자들을 잡을 방법이 없더라구요."

그녀는 부푼 꿈을 뒤로 하고 첫 사업을 5년만에 접었다. 그녀는 두번째 사업으로 건설업을 택했다. 노가다판으로 불리는 이 업종을 택한 이유는 그녀의 큰 오빠와 셋째 오빠가 건설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다시 잘되겠거니 생각을 했다. 2002년 명보건설 대표로 또 한 번 변신했다. 하지만 첫 사업의 청산절차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벌인 사업은 운영 부실로 2003년 문을 닫았다.

지난 2005년 그녀는 파이프 납품업체 (주)우대로 세번째 사업을 했다. 당시 관공서 공사 수주 절차를 모르지만 직원 하나 내맘같이 움직이겠거니 생각했던 믿음이 보기좋게 뒤통수를 맞으면서 또 한 번 주저앉았다. "관공서 공사는 사업 발주 후 자금이 집행되는데 담당직원은 그것을 이용해 회사돈을 횡령했던 겁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조 대표는 지난 2007년 말 또 한 번 부도를 맞고 무너졌다. 당시 평생을 같이할것 같던 친구도, 동료도 떠나가는 극한 상황이 닥치고나니 조 대표는 속세의 연을 끊고 출가까지 심각하게 고민했었다고 말한다.

"절망 끝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친구가 재기하면 갚으라고 거금 1억원을 내밀었어요. 친구의 '네 실력을 발휘하면 분명히 일어날 것'이라는 말에 큰 힘을 얻었어요."

2008년 초 (주)대성산업개발을 설립하면서 그녀는 네번째 도전을 했다. 이번엔 댐이나 하천 공사에 사용되는 블록납품과 토목기자재 제조 유통분야다.

"여자니까 봐주겠거니 하는 사고는 사회에서 통하지 않아요. 10여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힘은 나에 대한 믿음, 직원에 대한 믿음이었어요. 여러번 사업을 실패했지만 인생까지 실패할 수 없어 계속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요."

그녀의 네번째 사업은 1년밖에 안된 걸음마를 하고 있다. 물론 입이 떡 벌어질 만큼의 매출을 올리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믿는다. 2009년, 마르지 않는 열정으로 힘찬 도약을 꿈꾸는 기회가 올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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