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 감은사 ①
경북 경주 감은사 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8.10.30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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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송부일의 문화재 돋보기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대왕암)을 뒤덮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저 수평선 여명에서 당신의 꿈을 봅니다

죽어서도 태평성대 염원했던 대왕의 숨결 고스란히
문무왕-김유신 영혼 만나 이견대서 만파식적 내려줘


송 부 일

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岩)은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불식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해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검은 조약돌이 수 없이 깔려있는 동해 바다 봉길 해수욕장, 파도가 오가며 신라의 역사를 지켜 온 곳이다.

횐 거품을 토해내는 바다에 서서 200m 가량 떨어진 바다를 바라보면 아담한 바위섬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문무대왕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다.

제멋대로 생긴 바위 군이 자리를 하고 동서남북 4방으로 가운데에 가공한 고랑이 패어있다. 주위에 자연 암석들이 기둥 모양 세워져 있다.

중심 길이가 약 3.5m 되는 고랑 안에는 거북 등 모양 길이 3m, 폭 2.2m 의 돌이 얹혀져 있는데 고랑에는 항상 약간 물이 덮여 있다. 사방을 트인 십자형의 수로를 통하여 물이 들어와 3고랑이로 서서히 빠져 나간다. 이는 거북 돌을 움직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또한 이물은 항상 움직여 웅덩이의 수온을 조절하여 영원히 변치 않게 하는 천삼백 년 전 과학이 여기에 있었다. 이 돌 밑에 문무대왕의 유골이 장치되어 있다 하는데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나 둘러싼 주위 환경과 안쪽에 인위적으로 바위를 따낸 흔적이 있어서 대왕암으로 불려 왔다.

사실 옛 부터 이곳 주민들은 대왕암으로 알고 신선시하며 살아 왔다. 지금도 백중날 대왕 제를 지낸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를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승하하신 신라 30대 문무왕의 납골을 모신 곳이던 아니던 간에 우리의 얼과 민족정신이 있는 수중능이다.

이 곳에서 뒤 돌아 다리를 건너 감포 쪽으로 조금 가면 신무왕이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사적 159호 이견대가 나온다.

만파식적은 세상의 파란을 없애고 편안하게 하는 피리라고 한다. 신무왕이 선왕을 대왕암에 장사하고 대왕암이 보이는 용담산에 살피니 동해에서 산이 떠서 감은사 항해 왔다 갔다 하였다. 이에 신무왕이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점괘에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영혼이 서로 만나 신라의 평화를 위해 보물을 내려 준다는 것이다.

이에 신무왕이 바다 더 가까이 가서 살폈다. 거북이 산머리 같은 산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두 그루가 되었다.

이튿날 정오에 그 곳에 왕이 행차를 하니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 지며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이틀이나 일러 났다.

이를 기다려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 하여 지자 왕이 손수 배를 타고 작은 섬에 들어가니 홀연히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왕에게 받쳤다.

바다에 용이 되신 문무왕과 천신이 되신 김유신 장군이 왕에게 내리는 큰 보물이라는 것이다.

용에게 신무왕이 대나무가 갈라졌다 합쳐 졌다하는 연유를 물으니 용이 손뼉이 마주 처야 소리가 나듯이 대나무도 합쳐졌을 때 소리가 나는 것, 왕이 소리의 이치로 천하를 다스리게 된 징조라며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였다.

왕이 대나무를 잘라 나오자 용과 산이 홀연히 떠났다.

그 후에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으니 적군이 물러가고 질병이 없어지며 가뭄에는 비가오고 홍수가 지면 비가 그치고 비바람이 잔잔 했다한다. 이를 만파식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만파식적은 경주를 벗어나면 소리가 나지 안았다 한다.

만파식적 까지 나라를 위하여 선물 주고 가신 분은 세계 어느 나라 왕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군왕은 없다.
신라 신무왕이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사적 159호 이견대.

681년 7월 7일에 그의 아들 신무왕이 그의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감은사를 세웠다.

동해 구에서 대종 천 따라 올라가면 잘 생긴 산을 배경으로 하여 아담한 절을 지었다. 용이 되신 대왕께서 오셔서 부처님과 함께 나라를 지키던 곳 이다.

그러나 임진란 때 왜병이 아무 이유 없이 불을 놓았다. 이는 우리의 얼, 민족정신을 태워 버린 곳이다.

불타버린 감은사에 석탑 2개가 외롭게 서있고 용이 놀던 용담에는 물이 마르고 탑 뒤로 앙상 주추 돌과 주변에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감은사는 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 배치에서 쌍탑 일 금당으로 바뀌는 과정에 동, 서로 두 탑을 세우고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 북 선상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최초의 사지이다.

중문 석탑 남쪽에 금당을 짓고 강당을 석탑의 북쪽 위치에 지었다.

회랑은 남, 동, 서로 금당 좌우는 동, 서 회랑을 연결되는 주회랑 이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금당터 앞에 가면 석재 중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보기 드문 석재가 보이는데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있던 것이 아닌 가 생각 된다.

금당 중문 남쪽엔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밖에는 대종 천 따라 들어온 동해 바닷물이 고여 있던 용담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금당 바닥은 이중의 방형대석위에 장대석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루를 깔듯이 초대석을 깔아 장대석 밑이 빈공간이 되게 특수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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