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괴강의 이름으로
<16> 괴강의 이름으로
  • 김성식 기자
  • 승인 2008.09.10 2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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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의 숨결
◈ 제월대 전경 고산9경을 낳은 제월대 부근은 벽초 홍명희가 유년시절 낚시를 하며 꿈을 키웠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넓은 들판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제월대가 휘감아 도는 괴강과 어울어져 한폭의 그림으로 다가선다.
1백년전까지 소금배 다니던 '삶의 젖줄'

벽초, 괴강서 낚시하며 유년시절 꿈 키워
'江口商船- 시 통해 '소금배- 존재 전해져

김 성 식 생태전문기자 <프리랜서>
이 상 덕 기자


괴산읍 동쪽을 지나는 달래강은 괴산 사람들에겐 추억의 장소다. 괴강다리가 놓이기 전 '차배-라는 나룻배가 오가던 느티여울엔 여름이면 멱을 감고 뱃놀이 하는 사람들로 항시 북적였다.

"느티여울 맑은 물에 쏘가리가 살찌고/ 잘 익은 솔잎술을 손님에게 권하는 즐거움이여"라고 노래한 한시가 전하듯 괴강은 이곳 사람들의 가슴에 뚜렷이 각인된 고향의 모습, 어머니 모습 같은 존재다.

괴강은 또 이곳 사람들의 삶의 젖줄이다.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 느티여울까지 소금배가 오가며 필수품인 소금 뿐만 아니라 비릿한 바다 산물이며 바깥 세상의 소식까지 덤으로 전해주었기에 괴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닌 생명과 소통을 이어준 고마운 끈이었다.

이러한 중심에 늘 느티여울이 있어왔다. 괴강이란 이름 자체가 느티여울, 즉 괴탄(槐灘)에서 유래됐고 지금도 괴산 하면 떠오르는 것이 괴강이듯 그 이면엔 언제나 느티여울이 자리잡고 있다.

느티여울의 잔잔한 물결을 따라 좀 더 아래로 내려가면 또 다시 물머리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여울을 일으킬 즈음에서 괴산이 낳은 거목 중의 거목 한 사람의 체취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현대사의 수레바퀴에 맞물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벽초 홍명희다.

'임꺽정-이란 역사소설로 널리 알려진 홍명희는 괴강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괴산읍 인산리 생가(부친 홍범식의 고가)에서 태어나 괴강에서 멱을 감고 낚시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전하는데 그가 낚시를 하며 꿈을 키우던 곳이 바로 고산구곡의 하나인 만송정 부근이다. 만송정이 있었다고 하는 곳은 괴산읍 제월리 바로 앞 강변으로 예전엔 커다란 소나무가 강물과 어울어져 멋진 절경을 이뤘다고 하나 지금은 노송(老松)이 강물에 떠내려가 옛 정취는 온 데 간 데 없고 최근 심어진 어린 소나무들이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인근에 있는 제월대로 발길을 옮기니 소나무와 참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주차장 한편에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눈에 들어온다. 고대 그리스 건축물에서나 봄직한 돌기둥이 부동자세로 사열하듯 서있고 그 한 가운데에 신영복 선생의 필체가 새겨진 하얀 비문이 한낮 햇볕을 받아 서럽게 버티고 있다.

숲속 길로 이어진 제월대 정상엔 조선시대 유학자 유근(柳根)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 경치에 반해 지었다는 고산정이 이끼를 뒤집어 쓴 채 고즈넉이 서있다. 팔작지붕을 떠받친 처마 안쪽에 명나라 사신이었던 주지번(朱之蕃)의 호산승집(湖山勝集) 편액과 웅화(熊花)란 선비가 썼다는 고산정사기(孤山亭舍記) 편액이 '세월-처럼 걸려 있는 게 무척이나 고아하다.

고산정은 황니판,관어대,은병암,제월대,창벽,영객령,영화담,고산정사 등과 함께 고산9경을 이루지만 그 자체가 괴산8경으로 꼽힐 만큼 주변 경치가 일품이다. 고산정에 올라 사방을 내다보니 멀리는 속리산서 발원한 달래강(괴강)이 푸른 몸짓으로 정자 밑을 휘돌아 흐르고 남으로는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말을 타고 백두대간을 내달리듯 한없이 굽어보인다.
취묵당서 바라본 괴강(왼쪽)과 망화정서 바라본 괴강.

넓은 들판 한 가운데에 홀홀히 선 제월대를 휘감았다 빠져나온 강물은 이내 배나무여울(이탄)을 지나 괴산읍 능촌리의 취묵당 앞에 다다른다. 취묵당(충북도 문화재자료 61호)은 1662년 시인인 백곡 김득신이 세운 역시 팔각지붕의 독서제로 조선시대 정자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취하여도 입을 다무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취묵당은 김득신이 36년간 사기(史記) 백이전을 무려 1억1만3000번 읽은 것을 비롯해 웬만한 글과 책을 1만번 이상 읽었다는 곳으로 유명하다. 취묵당의 이명인 억만재(億萬齋)는 글자 그대로 김득신이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취묵당 안에는 중건기와 각종 시문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김득신이 썼다는 '醉默堂-과 후손 김교헌이 썼다는 '億萬齋-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다만 전면 기둥엔 시 '용호(龍湖)-를 양각한 주련이 있는데 이 역시 세번째 싯구의 주련이 없어져 임시로 종이로 써붙인 게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주련에 쓰인 용호란 시의 내용이다. '古木寒雲裏(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秋山白雨邊(가을 산엔 소낙비 들이치네)/暮江風浪起(날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漁子急回船(어부는 급히 뱃머리를 돌리네)-

이곳 취묵당에는 또 예전에 괴강을 통해 소금배가 다녔음을 알 수 있는 '강구상선(江口商船)-이란 귀중한 한시가 걸려있다. 글을 통해 '달래강(혹은 괴강) 소금배-의 존재를 기록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번역한 내용을 보자.

'우리집은 강가에 있으니/ 닻내리는 곳에는 백사장이 달빛에 밝다/ 바람은 한강어구에서 불어오고/ 내일은 생선과 소금파는 날이다/ 문밖에 장사배가 매여있고/ 멈춘 돛대는 산그늘 연기속에 있다/ 뱃가에서 돛대와 뱃머리를 요란스레 두드리니/ 마을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 오간리 포구 괴산군 감물면 오간리 강변엔 1백년 전까지 소금배가 들나들던 포구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수심도 얕아지고 포구 흔적도 사라져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원내는 '잊혀진 뱃길-의 존재를 증언해 준 이창훈씨.

짭짤한 새우젓내가 투박한 뱃사람들의 말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풍겨나올 듯한 생생한 정경을 시를 통해 가슴에 담고 다시 강변을 찾아 나오는데 산모퉁이 건너편으로 사당 하나가 그림처럼 다가온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한 충민사다. 잠시 들려 마음속으로나마 두분 공(公)의 혼을 기린 후 찾아들어 간 곳이 감물면 오간리다. 오간리란 마을 이름이 어색하게 다가와 마을 자랑비를 훑어보니 여러모로 생활조건이 좋아 '오가리-라 불렀던 것이 어느샌가 오간리로 변했단다.

오간리 강변엔 1백년 전까지 포구가 있어 이곳으로 올라온 소금배가 거래를 마친 후 인근서 생산된 쌀과 콩 등 곡물을 싣고 서울쪽으로 떠났다고 하나 지금은 수심도 얕아지고 포구 흔적도 사라져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다만 마을 안쪽에 있는 아흔아홉칸 집의 장손 이창훈씨(81)로부터 "집을 지을 때 목재를 배로 실어날랐다"는 증언만이 '잊혀진 뱃길-의 존재를 알려줄 뿐이었다.

이씨가 중건했다는 강변의 망화정에 들러 난간 사이로 비쳐진 괴강을 바라보니 조금전 취묵당서 느꼈던 강구상선(江口商船)의 '소금배 풍경-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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