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한 유혹
아찔한 유혹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4.04.0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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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서풋, 봄이 발걸음을 내디딘다. 험한 뱁새눈을 한 바람에 꽃들이 움찔 놀란다. 이에 잠시 머뭇거릴 뿐, 흠칫흠칫 경기(驚氣)를 일으키며 꽃은 피어난다. 여기저기서 고음의 비명이 터진다. 꽃을 시샘하던 바람이 주춤하는 사이 놓칠세라 여름이 들이닥친다.

바람도 뜨거운 햇살에 맥을 못 추고 지친다. 아무리 나무를 흔들어대고 바람을 일으켜도 후덥지근한 바람이 인다. 바람을 반기는 계절은 가을이다. 순한 바람은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과일은 색이 짙어져 농후해지고 나무들은 가장 화려하게 색을 입힌다.

겨울이 오면 매서워지는 바람을 기어이 감수한다. 이미 눈치챈 꽃과 나무들은 스스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목이 된다. 그들은 안다. 이 혹독한 바람을 견뎌야만 봄이 온다는 것을. 또 한 생을 찬란하게 꽃을 피울 수 있음을. 꽃눈이 부푸는 자리에 간질간질한 젖몸살도 기쁨일 수 있음을 봄을 기다리면서 안다.

자연의 사계(四季)를 휘도는 바람이다. 때로는 야속하지만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향기를 날려 은밀한 유혹을 던진다. 달콤함에 빠져들어 벌과 나비는 꽃들을 옮겨 다니며 꽃가루를 나른다. 바람이 분 까닭이다. 열매가 커가고 있음은. 저마다 바람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이유를 품는다.

인생에도 내내 바람이 분다. 지금의 나이가 되면 흔들리지 않고 잠잠해질 줄 알았다. 지금까지 크게 울어대고도 모자란 표정이니 내겐 공포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불어닥칠지 늘 긴장한다. 누구에게는 간지러운 바람이 유독 나에게만 독하게 구는지.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은 날이 늘어난다. 이순의 나이에 주책없이 눈물만 많아진다.

산다는 건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서 유혹의 바람을 만나는 일이다. 갈등의 갈래 길은 가 보지 못한 길에 미련을 남긴다. 도착할 때쯤 남아있는 유혹은 끝내 되돌아가 다른 길을 선택하게도 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뀔지라도 유혹을 저버리지 못하는 실수를 범할 때가 있다. 그래도 두고두고 미련의 앙금이 남지 않아 가볍다. 바람이 준 상처가 인생의 조언이 되어준다.

맛은 기가 막히지만 독이 있어 잘못 다루면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생선이 있다. 간, 내장, 난소에 들어있는 무색, 무취의 테트로톡신이 목숨을 앗아간다. 한 마리가 가지고 있는 독이 33명을 죽음에 이르게 할 양이라는 것이다. 끓여도 사라지지 않아 반드시 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전문 조리사가 요리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살은 다른 생선과는 다르게 닭고기와 생선의 중간쯤 되는 쫄깃한 맛이 난다. 껍질은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훌륭하다. 미세한 단맛은 다른 고기보다 단연 뛰어나다. 독이 강할수록 맛은 더 좋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과 맞먹는 지옥을 넘나들면서까지 먹는 아찔한 유혹, 복어다.

백수가 되고 나서 진정한 제주를 만난 나. 보고 또 보아도 그리운 얼굴. 여기선 모처럼 웃고 떠들고 유쾌해진다. 어디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 음성에 오면 빨리 가고 싶어 안달이 난다. 숲이 보고 싶고 하늘로 쭉쭉 뻗어 오른 삼나무도 아른거린다. 꿈에서도 푸른 바다가 보인다.

제주, 갈 때마다 깨지는 경비에 가계가 휘청하지만 술렁임을 누를 수가 없다. 너는 나에게 여전히 복어 같은 아찔한 유혹이다. 맨살을 드러내고 말간 미소로 순간 네가 내 안에 이렇게 깊이 자리 잡을 줄 몰랐다. 천생 나의 일상을 저당 잡혀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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