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엔 오랜만에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돌았다.
진달래 봉오리는 입을 꾹 다문 채 분홍빛만을 비추고 있었고 곳곳에 햇빛이 들이칠 만한 낮은 땅엔 제비꽃이 피어 무채색 산에 활기를 더해주었다.
생태에 무례한 나는 그저 숲길을 걸으며 혼자만의 흥에 취했지만 함께 간 지인은 나무의 수피를 만지며 안부를 묻는다.
문득 얼마 전 수업에서 함께 읽은 김선남 그림책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어> 텍스트가 생각났다.
겨울에 본 나무는 알아보기 힘들게 비슷한 모양과 색깔이지만 꽃이 피면 벚나무였고 그늘을 보고 느티나무였고 잎을 보고 은행나무 였음을, 그리고 향기를 맡고 계수나무였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처음엔 다 같은 나무인 줄 알았는데 잎이 달리고 열매를 보면서 나무의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겨울, 모두 비슷하게 생긴 것 같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으로도 보이는 계절, 겨울은 속으로 자라는 시간이다.
모든 잎을 떨구고만 거친 나무의 살결은 겨울 숨결에 단단해지고 찬 숨으로 옹골진 속을 채우고 있다.
안쪽은 두렵고 밖은 차갑기만 시간을 지나야만 하는 나무가 있듯이 우리의 생도 그러할 것이다.
특별히 겨울을 뒤돌아보는 시간이다. 지난 계절을 살면서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은 상처, 영광뿐인 어느 순간, 만발한 꽃과 잎의 축복, 비와 바람에 쓸린 살갗을 보듬어 안고 애도의 시간을 보내며 또박또박 지난 시간을 복기하는 계절이 겨울이다.
모든 생물이 자신에게 필요 없는 부분은 퇴화되고 오직 생존케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처럼 겨울엔 그런 것들의 우열을 가려내는 고통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빛나야 하는 순간에는 겨울에 했을 깔끔한 영적인 가지치기의 결과가 투명하게 반영된다.
나이 든 어느 지인은 겨울이 되면 가족을 떠난 혼자서 일주일 정도의 여행을 한다고 한다.
젊을 적엔 아내 되시는 분이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지만 거절하시고 굳이 혼자만의 여행을 하셨다고. 여행하는 동안 어떤 생각을 하시냐 물으니 지난 일 년 동안 자신이 했던 안팎의 일을 반추하며 고쳐야 할 것을 정리하고 점검하는 시간으로 보내신단다.
특히 가족에게 실수 한 것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와서 다시 일 년을 사신다는 말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가족의 만족도가 크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왜 겨울이냐 물으니 봄을 맞이하기 좋은 계절이고 안으로 성숙하기 좋다고 말씀 하셨다.
작품 속에 나오는 여러 나무들은 분명 겨울의 시간을 대충 흘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알고 보니 벚나무였고 연초록의 동글하게 잎을 내는 은행나무였다. 나무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피었다 졌다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면 늠름한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영광스러운 찰나가 오시지 않을까, 수직으로 내리던 비가 바람이 불어 사선으로 내리는 빗방울끼리 만나는 순간, 절대 만나지 못할 운명의 빗방울이 부딪혔을 순간의 폭발이 내 생애도 있으려면 겨울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 입속에서 내가 넘어질 때 숱한 후회와 자책이 찾아와도 결국 나는 나밖에 될 수 없음의 정의에 도달해서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이런 시간을 보내신 나무님을 생각할 때 무한 존경을 나무님께 보낸다.
하여, 나무를 닮은 우리는 더욱 울창해지겠지.
봄이 잔소리하듯이 길거리엔 매화꽃이 날벌레처럼 날아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