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최근 몇년은 참 잔인했던 봄이었습니다. 꽃피는 봄에 물오르는 신록과 함께 어딜 보아도 설레이고 싶었지만, 멋진 풍경을 보고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6월 들어 짙어지는 신록과 함께 내 마음 속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기분입니다. 어느덧 7월, 올해의 반이 지났습니다. 한겨울에 태어난 제가 덥고 습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여름이 이제 툭하면 땀이 나도 참 좋습니다. 식단도 소박하고 간결한 것을 좋아하게 되고, 계절의 흐름에 따라 종종 즐기는 나만의 휴식을 찾아가는 변화를 체감합니다.
이른 아침에도 해가 중천인 것 같은 더위입니다. 이 시간대에 즐기는 산행 겸 산책이 더위도 피하고 일찍 일어나는 새라 가장 모범적이지만, 오후 4시 넘어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시간대에 노을을 즐기며 선선한 바람에 땀을 식히는 것도 아주 좋습니다. 전자가 더 더워지는 것이라면, 후자는 더 시원해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가 예쁜 전원의 풍경이 더 잘 들어오는 편입니다. 제가 집 가까운 곳에서 즐기는 기분좋은 산행 두 곳을 소개합니다.
하나, 국사봉의 여름. 토요일 아침 일찍 가볍게 길을 나섭니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은 일정이 있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어했는데, 이제는 휴일 아침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 늦잠이 아깝습니다. 남일면 신송리, 가산리, 화당리에 걸쳐 있는 국사봉입(282m)니다. 산 아래 금강사는 국사봉에 아늑하게 안긴 청정도량입니다. 교하노씨 체화서원 입구에서 풀섶을 헤치며 오릅니다. 초반에 경사가 좀 있지만 대체로 완만한 편인데, 초입에 산딸기 덤불이 가득해서 때를 잘 맞추면 새콤달콤 입이 즐겁습니다. 아무도 오르지 않았는지 지난 달에도 새붉은 산딸기를 제법 많이 따먹고 흥얼거리며 올랐습니다. 싱그러운 숲을 오롯이 즐깁니다. 풋풋한 손길을 바라는 개복숭아는 기관지에 좋은 약이라서 깨금발로 조금 따갑니다. 이미 온몸이 흠뻑 젖어 있고, 국사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북동쪽 시야가 좋습니다. 국사봉 자락이 맞은편 공군사관학교가 있는 시루봉과 함께 풍수가 좋은 지리라고 하는데(국사봉이 그냥 붙은 지명이 아닐 겁니다), 산책길로 다듬으면 좋은 휴식처가 되겠습니다. 시원한 바람에 답답한 마음은 날리고 호연지기를 담아갑니다.
둘, 왕암사의 여름. 1심만 3년을 끌어온 사건인데 항소심을 맡았더니 기록이 방대해서 토요일까지 3일을 내내 검토하고, 일요일에 겨우 항소이유서를 쓰고 제출했더니 해가 기울고 있습니다. 책거리 하듯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땀을 흠뻑 흘리기로 합니다. 효촌집에서 동쪽을 볼 때도, 국사봉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큰 산줄기인 시루봉과 성무봉 넘어 남일면 문주리에 있는 수백년 된 오랜 사찰입니다. 성무봉(432m) 바로 아래 절까지 경사가 급하지만 차도가 있음에도 이런 곳은 튼튼한 두 다리로 가쁜 숨을 겪는 것이 예의입니다. 마을 입구에 차를 두고 올라가는 숲길은 깊습니다. 혼자서 발을 담그고 쉬기 좋은 비밀의 소(沼)도 있습니다. 역시나 걸어서 오르는 사람이 없는지 오르는 길에 산딸기가 가득합니다. 멍석딸기 꽃이 피는 걸 보니 이 녀석도 조금 있으면 먹을 수 있겠습니다. 유혈목이가 갑자기 지나가는 바람에 긴장하다가도 잠깐 서서 땀을 식히면 숲이 울창해서 동쪽을 빼고는 하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왕암사 뒤켠의 약수는 늘 마르지 않고 흐르는데 맛이 좋고 참 시원합니다. 이미땀에 다 절었지만, 영통하다는 기도도량에서의 108배는 온몸으로 땀과 더위를 즐기는데 최고입니다. 여기서 지척인 성무봉 정상에서 가져가는 호연지기는 또 다릅니다.
치열한 논리의 싸움에서 다 내려놓고 오롯이 자연을 즐깁니다. 수행자의 삶 같기도 합니다. 또다시 경쟁하고 충돌하는 세속이지만, 때때로 비우고 즐기는 여름이 더 좋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