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밀양박씨
10. 밀양박씨
  • 연숙자 기자
  • 승인 2007.09.0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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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읽는 문중 그뿌리를 찾아서
기묘사화 휘말려 유배… 500년간 뿌리내려

조선 중종때 정치가 박훈 낙향 후 터 잡아
청원 강외면 연제리 중심으로 집성촌 이뤄

길을 가다 아무나 붙잡고 성씨를 물으면 "대개 김씨·이씨·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성씨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한국의 3대 성을 일컫는 말이다. 지역과 상관 없이 대성을 이룬 한국의 대표 성씨 중,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 밀양 박씨는 조선 후기 청주의 8대성으로 성장하며 충북 사림의 중심적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이는 지역출신은 아니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이 낙향하며 청주지역의 사대부 계층과 혼인을 맺으며 지역 사림을 이끈 세력으로 발전했다.

김양식 충북학연구소 연구원은 '청주 토박이와 성씨'에서 밀양 박씨를 포함한 8대성의 세거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전, 청주지역에서 번성하고 세력을 떨쳤던 토박이 성씨는 모두 8성이었다. 이들을 일컬어 청주 8대성이라 하였다. 이들 8대성은 조선 후기에 청주지역에서 세력을 떨친 대표적인 토박이 성씨들이다. 이들 8대성은 조선 후기에 청주 관아를 중심으로 사방에 자리잡고 세거하였는데, 동쪽에는 평산 신씨와 남양 홍씨가 살았고, 서쪽에는 밀양박씨가 세거하였고, 남쪽에는 청주 한씨와 교하 노씨, 북쪽에는 한산 이씨와 초계 변씨, 여홍 민씨가 주로 살았었다."

8대성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청주에 뿌리 내린 성씨지만, 씨족 수와 세거지를 중심으로 당시 청주지역을 움직이는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밀양 박씨가 세거했다는 서쪽은 현재 오송생명과학단지가 조성되고 있는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를 뜻한다. 이곳은 조선 중종 때 학자이자 정치가인 박훈이 낙향한 후 500년 동안 후손으로 이어지며 살아온 밀양 박씨의 세거지다.

마을에 큰 모과나무가 있다하여 모가올 박씨 또는 목박(木朴)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밀양 박씨. 그들은 어떤 연유로 이곳에 뿌리를 내렸을까

우리 나라의 모든 박씨는 신라왕 박혁거세를 원시조로 하며, 박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 분포를 보이고 있는 밀양 박씨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큰아들 언침이 시조로, 그가 밀성대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밀양으로 정한다.

이후 후손의 번창으로 전국에 뿌리내리며 곳곳에서 터전을 잡는다. 밀양 박씨가 청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선 중종 때 학자이자 정치가인 박훈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박훈은 기묘사화로 유배된다. 이때 가족들이 모부인 죽산 박씨의 친정집 인근인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로 이거 하게 되었고,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박훈이 이곳에 거주하며 입향시조가 된다.

이후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 모가올마을을 중심으로 호계리와 오송리, 상정리, 월오동 등에 집성촌을 이룬다. 문중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박훈의 묘가 옥산면에 있으며, 묘 근처에는 재실로 사용하는 영모재가 있다.

월오동 동막돌 입구에 밀양 박씨 집안에서 배출한 5명의 효자와 효부를 기리는 비석과 세거지 표지석, 그리고 사당 월오사가 옛터로만 남아 있다.

◆ 인물 & 인물

학문의 고장 자리잡는데 큰 역할

입향시조 박훈, 낭성팔현 중 하나로 지역서 추앙
조선 중기 청주가 학문의 고장으로 주목받게 된 데는 '낭성팔현'으로 불리는 학자들로부터 기인한다. 청주에 뿌리 내린 밀양 박씨 입향시조 박훈은 청주의 '낭성팔현' 중 하나로 청주가 학문의 고장으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기묘사화로 인한 낙향이었지만, 학자로 정치가로 중앙무대에서 활약한, 그는 높은 학문으로 지역에서도 추앙받는다. 유학을 뿌리내리며 지역 사림을 키운 그의 업적은 용정동 신항서원에 모셔진 위패로도 확인할 수 있다.

박훈의 아버지 눌재 박증영 역시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해 성종으로부터 신망을 받은 인물이다. 홍문관 교리를 지내며 시문(詩文)과 문필가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는 데, 눌재의 시문집을 판각한 목판 '눌재강수유고판목'은 현재 청주대학교박물관에 31장이 보관·전시되어 있다. 시문집 서문을 우암 송시열이 지었을 만큼 눌재의 높은 학식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나라를 위해 싸움에 나선 선조로 병자호란 때 용인 광교산에 진을 치고 크게 적을 무찔러 공을 세운 박의와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로 호송한 공으로 박춘성은 공신반열에 오른다. 또 임진왜란 때 청주성 탈환에 공을 세운 박우현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 이각과 함께 소산(蘇山)을 지키다가 패하여 성으로 돌아왔다가 적이 밀양까지 쳐들어오자 성에 불을 지르고 후퇴하는 등 목숨을 바쳐 싸운 박진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자 박제가는 19세 때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하는 등 우리나라 실학의 대가로 우뚝 섰으며, 박춘재는 어려서부터 소리를 좋아하여 명창(名唱)으로 이름을 날린다. 이런 선조의 유지를 이어받아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로는 청주의 문화를 움직이는 박영수 청주문화원장과 청주향토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는 박상일 청주대박물관학예실장, 박홍규 전 청주부시장, 환경활동가 박창재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사업팀장, 박종효 실업극복연대 대표, 박충규 변호사 등이 있으며, 박상화·상수·상철 3형제는 모두 교수로 재임하며 학자 가문을 잇고 있다. 박상일 청주대박물관학예실장은 "귀양살이 하다 낙향해 보니 선조의 유언이 벼슬하지 말라였다"며 "후손들이 벼슬길에 많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청주에 조선 중기부터 사림을 뿌리내리는 역할을 했으며, 훗날 우리 고장이 사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30∼40년 전만 해도 문중 어르신들로 북적이던 연제리 모가올마을은 이제 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후손들도 다 떠나고 없다"며 "이제 기념물로 지정된 모과나무를 보며 살았던 흔적을 찾아보게 되었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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