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백두산 해맞이
<18> 백두산 해맞이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8.08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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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추이는 태양빛 아래 '조국은 하나다'

백두산에 오른 남과 북의 작가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보라 저 백두산에 비추이는 저 밝은 태양을 온 나라 겨레가 저 한 빛 아래 모여 사는 것이다.

떠오르는 태양에 이념의 장벽은 걷히고

아침 해가 백두산에 뜨는 것을 본다. 남과 북의 모든 작가들이 함성을 지르고 하나가 되어 밝게 빛나는 태양을 맞이한다. 백두산에서 어떤 일이 시작되는지 그것을 소개하려 한다.

해맞이 행사를 길게 설명하는 것 보다는 짧게 간단명료하게 글로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백두산을 올라가는 길은 바위를 켜서 타일처럼 박아서 어떤 자동차가 올라가든지 장군봉 아래까지 무사히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북측의 설명에 의하면 장차 남측에서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편하게 하기 위해서 현대의 정주영 할아버지가 만들게 했다는 전언이다. 내려서 200m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백두산 천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백두산은 참 신기했다. 우리가 아침 해를 맞이할 때 구름하나 없이 맑고 청명한 여름하늘을 보여주었다. 멀리 해 뜨는 동쪽 산 아래 백두산 다음으로 높은 소백산이 웅장하게 운해만리 (雲海萬里)를 연출해 보여주고 있다. 해가 뜨는 반대편 장군봉 머리에는 둥근 달이 두둥실 떠있고 해와 달이 만나는 멋진 광경을 연출한다. 해와 달이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보는 형상이 형제가 상봉하는 장면과 같다.

남과 북이 60년 만에 이념의 장벽을 조금은 허물고 백두산이라는 대자연 앞에서 형제와 동포의 정을 나누려하는 것이다. 남측과 북측의 작가들이 함께 사회를 보고 인사말도 해가며 시를 낭송하는 순서를 가진다. 북측의 오영재 시인이 읽는 시의 내용이 눈물겹게 한다. 또한 남측 고 김남주 시인의 시를 소설가 정지아씨가 낭송한다. 시의 전사, 해방과 통일의 전사 고 김남주 시인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도 백두산 상봉에서 그의 시 '조국은 하나다.'가 낭송된다. 모두가 조용하다.

김남주 시인의 고향은 전남 해남이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시골이다. 금년 5월 27일에 김남주 기념관이 생가 터에 지어졌다. 옛 정취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가 쓰던 물건과 책들이 전시되어 있어 보기 좋다. 어느 해던가 김남주 추모제가 해남에서 열릴 때 그의 생가를 방문하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자주 방문하게 된다. 그의 묘소는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 5.18묘역 옆에 잠들어 있다.

저와 함께 한국 신학대학을 다닌 고인이 된 고정희 시인이 있었다. 그도 생전에 민중을 위한 시를 썼다. 이곳을 고정희 추도식 때 김남주 형이 살아서 방문 할 때 인가 보다 두 집안 어른들이 일찍이 짝을 이루어 주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김남주 시인으로부터 들었다. 고 고정희 시인과 필자는 선후배 사이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알고 지냈다. 서로 호의적인 발언들을 할 때 어느 한 쪽에서는 좋아 했던 모양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처럼 인연이 닿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고 고정희 시인은 물을 좋아해서 그런지 고향집 뒷동산 작은 저수지 근처 밭에 잠들어 있다. 살아 있었다면 분명 백두산을 함께 올라왔을 것이다. 그리고 천지의 물을 바라보며 한마디 하며, 저 천지 물을 담아가야지 했을 것이다.

정지아 소설가의 맑은 목소리로 '조국은 하나다.'라는 시가 백두산 상봉에 울려 퍼졌다. 시인은 일찍이 갔어도 그의 시는 영혼으로 부활하여 그의 시가 낭송된다. 백두산에서 행사를 위해 간밤 한잠도 자지 못했을 진행자들의 얼굴이 기쁨에 젖어 있다. 눈에 알 수 없는 이슬이 촉촉이 맺힌다. 필자는 청주문화방송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행사를 열심히 취재하였다. 나중에 벽초 홍명희 문학축제에 사진이 일부 공개되기도 했다. 벽초의 홍명희 손자 홍석중을 만나 집중적으로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다. 그에게 남측에 내려올 것을 권고하며 백두산에서 귀찮을 정도로 졸졸 따라다녔다. 그는 남측에 내려오는 약속을 지켰다. 이듬해 광주에서 열린 6.15통일행사에 참여하고 돌아갔다. 필자는 만나지 못했지만 만난 사람들로부터 안부를 전해 들었다.

故 김남주 시인의 시로 해맞이의 끝을 장식

백두산에서는 남측의 최고령 방문자 이기형 시인이 북측의 최고의 시인 오영재와 뜨거운 동포애의 정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백두산 밀영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정답게 손을 잡았다. 분단으로 부모형제가 나누어져 60년을 살아온 처지를 서로 위로하는 것이다. 백두산에서 정용국 시인이 준 포도주 한 병을 베개봉 호텔에서 북측 아주머니에게 빌린 잔에다 따르고 간단한 예를 갖추어 포도주를 많은 작가들과 나누어 마셨다. 행사 내내 백두산의 아침 해가 붉은 기운을 토해 놓는 것 갔다.

나는 이제 쓰리라

사람들이 오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오르막길에도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사나운 파도의 뱃길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나는 이제 쓰리라

인간의 눈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맨 처음 보게 되는 천장 위에 쓰리라

만인의 입으로 들어오는 밥 위에 쓰리라

쌀밥 위에도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고 김남주 시인의 시가 백두산 해맞이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쓴다. 조국은 하나다. 바다에 가서도 쓴다. 모래위에, 성난 파도가 와서 지워버리면 산에 가서도 바위에 쓰겠단다. '조국은 하나다.'라고 마지막으로 시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겨레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김남주의 시가 백두산에서 낭송 된 것은 한국문학사에 영원히 기록 될 것이다. 조국을 사랑한 시인의 시 한 편이 그렇게 처절하고 목마른 사람들의 목구멍을 시원하게 뚫어 줄 수 있다니 말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라고 해서 모두 만세를 부르며 앞줄에 앉았다. 배창환 시인, 한쪽 건너 북측의 리호근 시인, 김형수 시인, 북측의 장혜명 시인, 어젯밤 백두산을 올라오기 위한 준비로 피곤한데도 모두 즐겁게 만세를 불렀다.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는 날을 기원하며…

6·15민족문학인 만세! 백두산 정상에서 마지막 찍은 사진을 보며 이런 시절이 자주 오기를 고대한다. 남측과 북측의 작가들이 백두산에서 만나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진정 하나 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뒷줄에 선 시인 고 은, 소설가 송기숙, 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함성을 지른다. 백두산에 오른 남과 북의 작가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보라 저 백두산에 비추이는 저 밝은 태양을 온 나라 겨레가 저 한 빛 아래 모여 사는 것이다. 사진을 찍고 난 다음 나는 남측의 작가들과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여러 번 하였다. 언제다시 백두산을 찾아 오르는 순간이 올까 지금으로서는 아득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자주 만나다 보면 백두산 뿐 만아니라.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칠보산, 묘향산, 금강산 등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경치를 감상하고 시를 쓰며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백두산을 오른 감격에 겨워 분단시대 동인 배창환 시인은 눈을 지그시 감는다.

아직도 고 김남주 시인의 "조국은 하나다"라는 시가 귀에 쟁쟁하다. 곧 바로 내려가면 삼지연 호수를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의 동상을 보게 될 것이다. 절대로 그 앞에 따라가서 참배를 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은 터라 얼마나 대단한 동상이 서있기에 그러는지 궁금해졌다. 백두산을 내려오는데 온갖 가지 야생화 꽃들이 융단을 펼쳐 놓은 것 같다. 아름다운 백두산의 여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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