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들이 존경스런 이유
한 덕 현 <편집국장>명절이나 집안의 제사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큰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게 참으로 다행이다. 제상을 차리거나 성묘할 때 큰 아들의 역할은 아주 독보적이다. 홍동백서니 좌포우혜니 하며 제물을 제자리에 앉히고, 조상의 묘 앞에서 "무슨 무슨 파", "몇대조 할아버지"하며 열심히 설명하는 큰 아들의 위상이 그날 만큼은 감히 아랫 것들이 범접 못할 경지에 놓이는 것이다.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건성으로 듣다가 그저 머리 숙여 절만 따라하면 그만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제상 차림이나 족보에 대해 수없이 들어 왔지만 아직도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이렇게 보면 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의 조상예우는 '처삼촌 벌초하는' 심정과 오십보 백보인 것이다. 어느 한 집안에 있어 자식의 됨됨이는 말할 것도 없이 부모, 특히 가장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똑같은 맥락에서 집안의 가풍은 큰 아들에 의해 절대적으로 좌우된다. 뼈대 있는 집안일수록 장자의 무게중심은 확고하다. 이는 논리가 아닌 체험으로부터 얻어지는 통찰력이다.
뜬금없이 큰아들 타령을 늘어놓는 이유가 있다. 근본을 얘기하기 위해서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직업과 세대, 성별의 구분이 없어진 역동적인 사회가 된지 오래지만, 그래도 삶에 있어 갖춰야 할 기본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바로 출생, 즉 태어남의 뿌리다. 주변만 한 번 둘러 봐도 쉽게 외국인이 목격되고, 어지간한 집안만 해도 자녀 한 두명을 국외로 유학보내는 말 그대로 다문화, 다인종의 글로벌 시대가 됐지만, 가장 바람직한 글로벌화는 우선 개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를 국내의 시각으로 보면 아무리 사회가 전문, 다변화, 기능화 되어도 결국 그 주체는 정체성을 인정받는 개인이다. 한 집안에서 큰 아들의 존재와 위상은 궁극적으로 가족 구성원의 실체를 대변한다.
충청타임즈가 난데없이 '문중순례, 뿌리를 찾아서' 시리즈를 싣게 됐다. 단 몇초만에 세계를 접하고 읽는 디지털시대에 고리타분한 마인드로 회귀한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이런 기획기사를 결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는가 하면, 학생이 교사에게 폭행을 가하는 어지러운 세태에서 잠시나마 '근본'을 되새기며 마음에, 혹은 정서적인 여유를 갖자는 취지에서다. 주말판으로 싣기 때문에 독자들이 여유를 가지고 읽을 거리로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울러 그동안 잊고 지냈던 주변의 인물에게도 이 기사를 보며 한번 쯤 살가운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뿌리의 확인은 결코 혼자서만이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미국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Roots)'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1976년 간행돼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이를 바탕으로 TV드라마로 만들어져 절찬리에 방영됐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미국에 팔려 온 쿤타킨테와 그 자손들의 삶을 묘사한 장편소설로, 흑인의 조상을 스토리로 풀어 내며 궁극적으로 작가 자신을 비롯한 흑인의 정체성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 주 내용이다 . 그런데 이 소설이 당시 소수민족뿐만 아니라 백인사회에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이유가 있다. 문제의 소설이 나온 70년대 중반은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와 각종 전쟁으로 미국사회의 상실감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혼돈이 백인들에게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했고, 이것이 소설 '뿌리'의 주제와 맞물려 기록적인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충청타임즈의 뿌리 시리즈가 비록 이러한 거대담론을 담아 내지는 못해도 지금의 혼란스런 사회현상에 나름의 청량제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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